우금치를 넘지 못한 농민군 본대는 통한의 패배를 뒤로 하고 후퇴를 거듭하다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른 후 해산한다. 

말이 해산이지 온전하게 고향으로 돌아간 농민군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북접 농민군들은 무주, 영동 등지에서 전과를 올리며 북상하다 보은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은 후 충주에서 부대를 해산한다. 

다른 한편 이방언 장군과 장흥의 농민군들은 토벌을 피해 남하를 계속한 농민군들과 합세하여 남도의 끝자락에서 농민혁명의 마지막 불꽃을 찬란하게 피워낸다. 

농민군들은 고부 군민을 능욕했던 역졸들의 거처 벽사역을 격파한 후 장녕성을 함락시켜 장흥 부사 박헌양을 처단하고 기세를 몰아 강진현과 병영성까지 함락시킨다.    

하지만 빗자루로 청소하듯 토벌전을 전개하며 남하한 조일 연합군과의 석대들 전투(석대 혈전)에서 패배한 농민군들은 다시 한번 무자비한 토벌전에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통한의 역사 속으로 스며든다.  

 

동학농민혁멸렬사 이소사상
동학농민혁명렬사 이소사像,박홍규作,2015,950X700,목판화

 

 

장흥 동학농민혁명 기념관 개관에 즈음한 전시회에서 박홍규 화백이 형상하였다. 

이처럼 치열하게 타오른 장흥 동학농민혁명사에 전설적인 여장군이 있었으니 이소사라 한다. 

'소사'는 과부 혹은 남편 있는 부인을 일컫는 호칭이니 제대로 된 이름조차 전하지 않는 분이다. 

정확한 고증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이소사는 장녕성을 함락시킬 당시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했으며 장흥 부사 박헌양의 목을 친 인물로 전해진다. 

체포 이후 뼈와 살을 발라내는 모진 고문으로 너덜너덜해진 육신으로 나주로 압송되었으며, 일본군은 이소사를 소생시켜 심문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일본군이 남긴 여러 기록에서 이소사를 미친 여자로 치부하여 동학도와 농민군 전체를 비하하려 애쓴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신문은 이소사라는 인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소사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했다고 한다."(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 자)

- 참고서적 : 장흥 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들(위의환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