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숙 선생의 소설 [녹두장군] 2권 '용천검'에 최제우의 검결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1892년 음력 11월, 때는 바야흐로 혁명전야..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삼례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칼노래를 부르며 집단 칼춤을 추는 장면이다. 

"칼노래라는 것은 우리 대신사 수운 선생께서 여기 전라도 남원 선국사 은적암에 머무르실 때 지으신 노래올시다. 여기 은적암에서 선사께서는 석달을 머무르셨는데, 그 사이 도력이 더욱 왕성하시니, 그 희열을 금치 못하여 스스로 노래를 지으시어 달 밝고 바람 맑은 밤을 타서, 목검을 짚고 묘고봉상에 홀로 올라 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시니, 그 노래를 일러 검결 즉 칼노래라 하였습니다.

검결

시호시호 이내 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 입고 이 칼 저 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데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칼노래

<시호란 때가 이르렀다는 말이다. 만년 만에 하나나 날까말까 한 장수로서,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오만년 만에 만났으니,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쓰고 어찌할 것이냐? 기세 좋게 칼을 들어 천지를 홀로 감당하고, 일월을 희롱하며, 우주를 덮을 용맹을 떨치니 만고명장인들 당할 수 없으리라.> 
30년 전 최제우에게 형을 내릴 때 특히 문제삼은 것이 이 검결이었다. 역모의 뜻이 역력히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제우가 순교한 뒤부터 관의 탄압이 한층 심해졌는데, 그런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런 공격적인 경전은 되도록 뒤로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은 어디까지나 마음을 바르게 가지려는 순수한 종교일 뿐 다른 뜻은 없다고 강조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검결은 동학의 여러 노래를 모은 용담유사에서도 빼버려 일반 교도들은 이런 노래가 있은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소설 [녹두장군] 제 2권 216~218쪽)

때가 이르렀다는 혁명가 최제우의 칼노래는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는 백산 격문으로,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리"라는 민중의 노래로 계승되었으며, 역사의 고비마다 의병투쟁으로 민중봉기로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촛불을 들고 나선 민중들의 투쟁도, 전봉준 투쟁단의 트랙터 행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할 것이다. 
민족사의 대전환기, 다시 오지 않을 때가 이르렀다는 칼노래의 서슬퍼런 기상이 되살아오는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어찌할 것인가?

오랜만에 홍규형을 만났다. 민족농업 전진대회가 치러지는 행사장 한켠에서 판화를 찍고 있다.
농민들이 판화를 받기 위해 줄을 늘이고 있다.
예의 구수한 입담으로 작품 설명을 하느라 작업은 한껏 늘어지지만 농민들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최제우는 우리 역사에서 근대를 연 최초의 혁명가" "검결은 혁명가요"라고 설명한다. 
혁명가 최제우의 칼춤과 칼노래가 작가의 손 끝에서 판화로 되살아났다.
칼춤을 추는 최제우의 역동적 동작과 얼굴 표정이 잘 표현되었다고 작가 스스로 흡족해했다.  

최근에는 황토현 전투와 우금티 전투 장면을 형상한 작품이 머리 속에서 완성되었노라고..
작업을 시작해야겠는데 놀고 있다고..
그런데 그 작품들은 실상 3년 전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판화전을 준비할 당시 이미 구상되었으나 창작되지 못한 것들이다. 
근력 더 떨어지기 전에 꼭 작업하시라고 응원해드렸다. 
막걸리 댓병 사 들고 지지 방문해야 쓰겄다.  
거처도 옮겼는데 여적 가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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