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하였으나, 특히 산경표에 따른 산줄기를 꼭 밟아보고 싶었으나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저 대간이나 정맥, 기맥에 속하는 산길을 밟으며 "여기가 거기다" 하는 것으로 만족해 왔다.

건강상의 시련을 딛고 대간과 정맥의 마루금을 지성으로 긋고 다닌다는 형의 소식을 접하고 최근에는 산에 있는 형의 위치를 확인해가며 한 번쯤 같이 할 날을 엿보아 왔다.
호남정맥에 금을 긋고 있다는 소식은 그날이 머지않았음을 의미하였다. 
어느새 형은 홀연히 내장산 구간까지 다가와 있었고 나는 만사를 제치고 금 긋기에 동참, 내장-백암이 속한 '추령-곡두재' 구간을 함께 하였다. 

이 구간이야 대부분 국립공원에 속한 길이 번듯하여 정맥 전체를 놓고 볼 때 잘 포장된 도로에 다름없고 내장산과 백암산은 여러 차례 올라본 터라 마음이 편안하다. 
이른 새벽 5시 40분경 형수님의 배웅을 받으며 추령을 출발한다.    
사위는 어둑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쌀쌀한 데다 이따금 섞여내리는 빗방울이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게 한다. 
얼마쯤 갔을까? 유군치 지나 장군봉에 이르는 된 비얄에서 그만 나의 산행 능력을 넘어서는 다소간의 무리를 하고 말았다. 앞서가는 형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 까닭이다. 
다리 근육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먹먹해지는 느낌에 '아뿔싸' 하고 속도를 조절하였으나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다.
장군봉에서 잠시 휴식하고 나서는 내리막길에서 다리가 후달린다. 
갈길이 먼데 걱정된다 싶었는데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되어 다리가 편안해지고 비로소 몸이 풀리는 것이 기분이 상쾌해진다.

장군봉을 지나자 시야가 트이는 날등이 이어진다. 때를 같이하여 날이 밝아오니 사진기를 꺼내 들고 걷는다.
날등 주위에는 이미 시들기 시작한 구절초가 보이고 간간이 쑥부쟁이가 섞여 있다. 바위 주변에는 산부추가 꽃대를 올리고 있으나 이 역시 이미 전성기를 넘어섰다.
추석 때 오른 방장산은 아직 가을이 오지 않은 여름이었는데 지금 내장산은 벌써 가을이 다 가버린 느낌이다.
아직 단풍도 들지 않았는데 잔뜩 찌푸린 날씨 탓이리라.

 
 
 

연자봉에 오른다.
풍수상 제비둥지(연소)인 서래봉 아래 벽련암과 마주하고 있어 연자봉이라 하며 연자봉을 바라보며 글을 쓰면 좋은 문장이 나와 일류 명사로 입신출세한다는 내용의 친절한 표지판이 보인다.
하! 산행기를 연자봉을 바라보며 쓸 일이다.
입신출세는 아니라도.. 아쉽다.
열심히 발길을 이어 신선봉으로 향한다.
여기서부터는 날등이 아닌 능선 안부를 도는  우회길이 많아 시야가 트이지 않는다.
그저 걷는다. 열심히...
걷다 보니 신선봉. 
잠시 쉬며 주위를 조망하려 하나 봉우리를 둘러싼 잡목 숲이 시원한 조망을 허락지 않는다. 

 
 
 

신선봉에서 까치봉을 향해 걷다 내장산길을 버리고 소둥근재를 거쳐 백암산에 이르는 길로 접어든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길이다.
길이 약간 좁아지고 키를 넘는 산죽밭이 나타나는가 하면 고도를 심하게 올렸다 내렸다 하는 숲 속 길이 이어진다. 시야도 잘 터지지 않아 위치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소둥근재, 소는 어인 일로 거기까지 올라 둥굴었을까? 짐을 싣고 넘어가다 힘에 겨워 둥굴어서 '소둥근재' 둥굴다 죽어서 '소죽엄재'라 부르기도 한다네.

 
 

언제 지나쳤는지 모를 소둥근재를 지나 얼마를 더 가니 큰 산줄기 하나가 따로 살림을 차리는 분기점이 나온다. 영산 기맥. 
입암, 방장산을 지나 고창땅을 흐르다 영광, 함평을 거쳐 목포 유달산에 이른다 한다. 
영산강 서쪽을 흐르는 산줄기라 보면 되겠다. 
형이 영산 기맥을 하는 날이 오면 고창 구간은 꼭 함께 하고 싶다.  

 

이제 내장산보다는 백암산이 가깝다.  그 무렵  다른 방향에서 호남정맥을 종주 중인 산꾼을 만났다. 형과 같은 '홀대모' 회원이라는 분. 
'홀대모'는 '홀로 대간과 정맥, 지맥의 마루금을 찾아 떠나는 전국적 산꾼의 모임'을 줄인 말이라 한다. 
하는 일이 장해서인지 이름도 질다. 
감격스러운 상봉 장면을 그분의 사진기로 내가 박아주었다. 내 무거운 사진기로도 박아줄걸 그랬다.
그 분과의 상봉을 뒤로하고 한바탕 된 비얄을 오르니 바로 상왕봉, 이제 백암산이다.

 
 
 
 
 
 
 

아기자기한 백암산의 능선과 주변 산을 바라보는 맛에 취해서일까? 앞서가던 형이 정맥을 벗어났다며 되짚어가자 한다. 백학봉에 이르기 전에 길이 나뉘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음에도 지나쳐버린 모양이다.
국립공원 구간은 길이 좋은 데다 공단에서 표지기를 모두 제거해버리는 탓에 자칫 갈림길을 놓치기 십상이라 한다.
되돌아가는 길은 왜 이리도 힘이 드는 건지.. 정맥꾼들은 이를 두고 '알바'라 하나보다.
두 갈래의 길을 두고 분석, 연구를 거듭한 끝에 길을 잡아 나선다. 
다행히 맞는 길이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판단이 매우 '과학적'이었던 듯싶다.

 

이제 산길은 고개(곡두재)를  앞두고 고도를 급격하게 낮추기 시작한다.
그 끝자락에 밤나무 농장이 있다. 알맹이가 자그마한 게 토종밤인 듯하다. 
 수확을 포기했는지 알밤들이 길 위에 수북하다.
잠깐 주웠는데도 주머니가 불룩해진다.
철조망 둘러쳐진 밤나무 밑에는 흑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오늘 산행은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동네로 내려와 보급 담당 겸 들머리 날머리 안내자인 형수님과 접선하여 간단한 요기거리로 점심을 때우니 시간은 오후 2시경. 8시간가량을 산에 있었다.

 

뭔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형은 조금 더 타겠노라며 다시 산으로 향한다. 
그 뒷모습 영 무겁더만 10리도 못 가고 내려오고 말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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