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쌓인 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눈만 내리면 마음은 산으로 달린다. 

이번 주말에도 눈이 내려 맘은 벌써 서너개의 산을 오르내렸지만 정작 몸은 산 아래 묶여 있다. 

앞으로도 눈 올날 많겠지.. 올해는 작년보다 더 멋진 송년산행을 준비해야겠다. 



아침에 일어나니 지붕 위에 눈이 살포시 덮혀 있었다. 지난주 토요일 이야기다. 

맘은 설레고 예정에 없던 산행에 나선다. 어디로 갈까? 오른 자리로 되돌아오기 용이하고 서울 가는 교통 다양한 곳, 정읍 내장산으로 간다. 

내장산, 그 중에서도 서래봉은 우리집 마루에서 잘 바라다보인다. 집을 지으면서 좌향을 그리 잡은 것이다. 

서래봉이 바위가 불꽃처럼 피어오르는 암릉으로 된 풍수상 '화산'에 속하고 집은 보통 화산을 바라보게 짓는다 들었다. 



내장산 일주문에 당도하였다. 내린 눈의 양은 우리집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겨울 하늘 시푸렇다.  

서래봉 가는 길은 일주문 오른편으로 이어진다. 



벽련암 지나 서래봉 오르는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매우 가파른 갈지자 길이다. 

그런데 어디서 길을 놓친걸까? 잠깐 해찰하는 사이 발자국이 사라지고 길이 있는듯 없는듯 험악해지고 나서야 정규 등산로에서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돌아가야 하는데 귀찮다. 길이 아주 아닌건 아니어서 그냥 오르기로 한다. 

눈의 양이 많아지고 미끄럼이 심해져 아이젠을 착용한다. 

어느덧 오름길이 끝나고 능선 암봉에 당도하니 서래봉 오른편 월영봉에서 오른다면 만나게 될 첫번째 암릉 부근이다. 

정규 등산로에서 왼쪽으로 벗어난 거라 생각하고 계속 오른쪽은 살피면서 올랐는데 올라보니 반대였다.

맞은편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 까치봉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마루금이 묵직하다. 

내장산은 서래봉 방향에서 헤아리자면 월영, 서래, 불출, 망해, 연지, 까치, 신선, 연자,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아홉개 봉우리가 말발굽 모양으로 휘감고 있다.  

때문에 내장 골짜기에 차를 두고 산에 올라 제자리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다양한 산길을 선택할 수 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거의 어안렌즈 수준의 초광각 렌즈 덕분에 아홉개 중  일곱개 봉우리가 그럭저럭 사진기에 잡혔다. 한번 헤아려보시라.

서래 - 불출 - 망해 - 연지 - 까치 - 신선 - 연자

봉우리들이 가진 이름들마다 분위기가 독특하다. 

옆집 처자, 고승, 술집 아씨, 새도 있네 그려..



쩌 아래 오른쪽 귀탱이 집단시설지구가 보이고 월영봉, 그리고 서래봉 암릉 구간의 가장 오른쪽 암봉이 이어진다. 

나는 암봉과 암봉 사이 옴팍한 곳으로 올랐다. 

저 멀리 펼쳐진 치열한 산줄기들이 장엄하다. 

저 산들 중에는 필시 회문산도 있을 것이며 회문산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전북도당 빨치산들의 치열한 유격전의 현장일 터이다. 

치열한 산줄기만큼이나 그 산 아래 사람들의 삶도 치열했을 것이다. 



서해쪽 고창 방향 서래, 불출, 망해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거의 칼날이다. 

산아래 바깥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성곽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서래-불출봉 구간은 암릉을 우회하여 산 바깥으로 도는 쇠사다리가 많은 구간이다.

아이젠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한다. 





84년도 겨울이겠다. 

대학으로 가는 입시관문, 학력고사도 마치고 널널했던 고3 말기 서울역에서 아홉시간 걸리는 야간 완행열차 타고 내려와 새벽같이 서래봉 을 올랐더랬다. 

그날도 눈이 쌓여 있었고 그야말로 함박눈이 펄펄 나리고 있었다. 

아~! 쩌 쇠사다리를 보니 그날 생각이 절로 나네. 

아무 준비도 없이 방수도 안되는 운동화짝 끄시고.. 아마 장갑도 없었을 것이다. 

피끓는 청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을.. 

"나 다시 돌아갈래~!"



장군, 연자, 신선, 까치, 연지 다섯봉우리가 잡혔다. 

까치봉에서 내장 계곡으로 뻗어내린 기다란 능선 끝에 내장사가 자리잡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다. 

까치봉 반대편으로는 백암산으로 가는 호남정맥 마루금이 이어진다. 

백암산으로 가는 도중 입암, 방장산으로 가는 산줄기가 갈라져나가 목포 유달산에 이른다. 이름하여 영산기맥, 그 산줄기의 맹주가 고창의 방장산이 되겠다. 



온 길을 돌아보고..



여기는 불출봉, 쩌 앞에 망해봉이 설핏 보인다. 

거기까지는 가고 싶었는데 여기서 하산해야겠다. 시간이 너무 없다. 



쩌 아래 아스라한 지점에 우리집 있을 거이다. 

날 좋은 날 망해봉에서 망원경으로 살피면 우리집 보인다. 

서해바다 보기 좋아 망해봉으로 이름붙였을 것이다. 




원적암과 비자림을 지난다. 

그때 그러니까 1984년 고3때도 이 길로 내려왔다. 

원적암에 내려오니 내리던 눈은 그치고 해 올라와 날 포근한데 원적암 툇마루에 보살 하나 나와앉아 새한테 보시하고 있었다. 

비자나무 열매를 까서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으면 새가 와서 집어먹곤 했었는데 보살님 왈 '원적새'라 하였다. 

그땐 되게 신기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새는 아마 곤줄박이였을 것이다. 생김새가 어렴풋하게 생각나기도 하거니와 곤줄박이가 눈 쌓인 겨울 사람 손에 잘 오른다는 사실을 나도 이제 알게 되었다. 

얼마나 배 고팠던지 원적암 옆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감을 마구 따 먹어 같이 갔던 친구는 배탈나 고생했더랬다. 

감은 여전히 주렁주렁 매달렸건만 누구도 눈길을 안주고 지나들 간다. 

나도 그냥 지나왔다. 그 땐 그랬지 하면서.. 



철도파업 끝날때까지 안타겠다고 맘 먹었던 KTX 잡아타고 서울로 올라와 저녁 일거리 하나 해치우고 오랫만에 친구를 만났다. 

초등학교 동창들 말고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만나는 거의 유일한 친구다. 

고삐리때부터 술병 꽤나 조지고 술잔 꽤나 부딪쳤던 전설의 고래, 함박눈 쏟아지던 그날 서래봉을 함께 올랐던 친구.. 

섀끼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머리 다 빠져불고 나만 폭삭 늙어부렀다.

낯바닥 쳐다보니 술 생각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