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민을 속이고 식량주권 붕괴를 꾀하는



민중의 소리



가을, 수확의 계절이 도래하였다. 이제 며칠이면 대명절 추석이다. 그런데 풍년가를 준비해야 할 농촌들녘에서 머리띠를 동여맨 농민들이 트랙터를 앞세우고 또 다시 논을 갈아엎고 농기계를 때려 부순다.


올 한해 그 어떤 농사에서도 재미를 보지 못했는데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왔던 쌀농사마저 완전개방이라는 실질적인 위기에 직면해있기 때문이다. 작년 대비 올 쌀값은 조곡 120kg당 1만원 이상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10년 전 쌀값폭락 악몽의 재현이다. 2004년 당시 쌀 시장 개방폭이 확대되고 추곡수매제가 폐지된다는 그 자체만으로 쌀값이 폭락한 바 있다.


농민들이 9월 투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9월 18일 전국 시군 동시다발 농민대회와 청와대 앞 농성, 전국농민대회 등을 예고하고 있다. 농민들의 요구는 간명하다. 정부는 일방적인 관세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치라는 것이다. 정부와 농민단체, 여야 정치권이 4자 협의체를 구성하고 국회에서 쌀시장 개방문제에 대한 사전동의 절차를 밟자는 것이다.


덧붙여 이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는 것이다. 농업을 직접 챙기겠다는 약속을 지키고자 한다면 적어도 FTA, TPP 협상에서 쌀을 제외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하라는 것이다. 일개 장관을 내세운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회피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부의 쌀 관세화 선언은 그 누구와도 합의되지 않은 것이며 협상 자체를 포기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다. 이를 WTO에 통보하겠다는 정부 계획은 나라의 식량주권과 한국 농업에 되돌릴 수 없는 치명타를 안기고 말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협상조차 하지 않고 쌀을 포기하려는 박근혜 정부의 어리석음은 천추에 씻지 못할 죄악이 될 것이다. 현 시기 쌀을 지키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안은 협상에 나서는 것이다.


쌀은 단순히 상품이 아니다. 쌀은 한국 농업을 떠받치는 최후의 버팀목이다. 쌀시장 개방으로 한국 농업이 붕괴된다면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농민들이 떠나고 농촌이 사라지고 식량주권이 붕괴한 다음에 후회하면 이미 늦다.


2005년 쌀 개방 반대 투쟁에서 두 명의 농민이 무자비한 국가공권력에 희생되었다. 당시 농민들은 추가적인 쌀시장 개방문제는 DDA 협상이 타결된 이후에 검토해도 늦지 않다고 주창하였다. 반면 정부는 DDA 협상은 타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졸속적인 협상을 밀어붙여 의무도입량을 배로 늘려주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DDA 협상은 타결되지 못한 채 장기 표류하고 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명백히 잘못된 협상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을뿐더러 잘못된 협상 결과에 기초하여 이제는 완전히 잘못된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정부는 의무도입량을 배로 늘려주는 것 외에 그 어떠한 협상도 불가능하다며 차라리 쌀 시장을 완전히 열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한다. 앓느니 죽자는 것이다.


DDA 협상은 타결된 것이나 다름없다던 정부 관료, 어용학자들과 달리 전 세계 농민들은 시애틀, 칸쿤, 홍콩으로 이어지는 피어린 반세계화 투쟁을 통해 DDA 협상을 결렬시키고 무덤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투쟁의 선두에 한국 농민들이 있었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누가 옳은 길을 걷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쌀을 지키기 위해, 식량주권 사수를 위해 농민들이 다시 머리띠를 동여매고 있다. 의로운 농민들의 투쟁에 적극적인 연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