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공원에서 창의문까지 북악산 성곽길을 걸었다. 한양도성 구간 중에서는 가장 험준한 산악구간이라 한다.  

북악산은 경복궁의 진산이다. 그런 북악산과 경복궁 사이에 청와대가 끼어들어 이제는 청와대 뒷산으로 더 친숙하다.

청와대가 들어서고 1.21 사태 등을 거치면서 군사지역으로 봉인되었다가 일반에 개방된 것이 채 10년이 안되었다.    



안국동에서 성대 윗쪽 와룡공원까지 가는 마을버스로 이동하였다. 

와룡공원에서 약 20분가량을 걸어올라 말바우 안내소에서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교부받는다.

말바우 안내소에서 숙정문까지는 잠깐이다. 

숙정문은 사대문 중 북대문에 해당한다. 실제 통행보다는 상징적 문이라 한다. 숙정문을 통해 성밖길로 나가면 삼청각으로 갈 수 있다. 

삼청각 하니 곧바로 박정희가 연상된다.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유신시대로 산 탓이 크겠다. 뭔가 내용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인터넷을 뒤지니 삼청각과 얽힌 박정희의 공공연하면서도 비밀스런 이야기들이 이래저래 검색된다.  



동대문 방면과 그 너머 잠실, 강동구 일대가 조망된다. 



성곽이 돌아 청와대 뒷쪽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이중 철책으로 분위기가 삼엄하다. 

청와대와 일반 백성을 가르는 분단선, 불통선으로 느껴진다. 

분단된 나라, 독재 치하의 백성임을 새삼 일깨운다. 개완허니 뜯어내버렸으면 쓰겄다. 



북한산 비봉 능선이 눈에 잡힌다. 오른쪽 솟은 봉우리가 보현봉이다. 



우리 세대는 1.21 사태를 전설처럼 듣고 자랐다. 

1.21 사태를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허 참 그놈의 향토예비군..



북악산 정상, 백악산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제한이 심해 사진기를 들이댈 곳이라고는 표지석 뿐이다. 




북한산 비봉 능선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급경사길을 내려선다. 창의문으로 향하는 구간은 인왕산을 마주보며 걷는다. 

창의문에 이르니 두시간 조금 넘게 소요되었다. 

가보지 못한 길을 걸었다는 뿌듯함보다는 아쉬움과 답답함이 많이 남는 길이다. 

빈틈없이 설치된 감시 카메라와 경계근부중인 군인, 등산복 차림의 경비대, 곳곳에 설치된 촬영금지 팻말..

이럴거면 뭐 하러 개방을 했나 싶다. 다시 오고싶지 않다. 

휴전선의 철조망이 걷히는 날에나 북악산 철책도 걷히게 될까?

아무래도 통일된 이후에나 찾아도 다시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 


 1392년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鄭道傳)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한양도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차(약 18.2km)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 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9월의 49일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한양도성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 12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 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한양도성의 골격이다. - bukak.or.kr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조선 백성의 고혈로 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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