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 반에 집을 나서 복성이재에 차를 두고 여원재에 도착하니 6시 반. 

남원 보절 사는 농민회원의 도움을 받았다.  

일주일만에 다시 찾은 여원재 고갯마루, 조각달이 중천에 떠 있다. 

여원재에서 고남산에 이르는 구간은 120년전 운봉을 공략하려던 농민군과 운봉의 박봉양 민보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장이다. 

가장 큰 전투는 방아치에서 벌어졌다. 고남산으로 가파르게 치고 오르기 전의 나지막한 구릉형의 산지가 이어지는 지역이다. 

김개남포의 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패해 예기가 꺾이고 영남지방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당시 박봉양 민보군은 영남지역 민관의 지원을 받아 막강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구간은 해 뜨기 전 어둠 속에서 빠르게 통과하였다.



그날의 농민항쟁을 기억하는 양 동짝 하늘이 핏빛으로 밝아온다. 



산길은 내내 답답하게 이어지다가 고남산 정상 부근에 이르러서야 시야를 열어준다. 

정면에 뽀족하게 솟은 만행산 천황봉과 산 아래 산동 들판, 산 너머는 보절면. 



바래봉 능선과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운봉고원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사진 오른짝 나지막하게 펼쳐진 산 이짝 저짝에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운봉고원 너머 가파른 산길을 짓쳐올라온 농민군이 매우 불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지형이다.   



여원재 너머 남원시내가 지척이다. 



운봉고원을 호위하듯 바래봉 능선이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너머로 하얀 구름을 인 지리산 연봉이 언뜻언뜻 보인다. 



고남산 정상, 고려말 왜구 토벌에 나선 이성계군이 필승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낸 석축이 남아 있다.  

산불감시초소와 관련 시설이 정상을 점유하고 있다. 


고남산(846.4m) 표지석



헬기장으로 나들이 나온 들꿩이 포착되었다. 하지만 렌즈가 없다. 가지고 다닐때는 안나오더니..

턱밑이 검은것으로 봐서 수컷이다. 



대간이 다시 사람사는 마을로 내려왔다. 

매요리는 사명당이 이름을 지어줬다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한때 애들 소리로 시끌벅적했을 폐교된 초등학교, 전성기때는 300여명은 족히 북적거렸을 규모다.  



남원과 장수 경계가 되는 삼거리, 삼거리 외약짝은 장수 번암면이다. 

길을 잘못 잡아 논길 아래로 내려가 한바퀴 다시 돌아 길을 바로잡았다. 물 아래로 내려갈 수는 없지 않은가? 

삼거리 지나 왼편 산으로 대간이 이어진다. 사치재 복원공사로 하여 길을 통제하니 물 아래로 돌아가라는 표지판이 서 있지만 타협할 수가 없다.  

나중에 어찌될말정 무시하고 산길로 접어든다.  



굽이굽이 산 넘어 당도한 사치재, 88고속도로 확장공사로 터널을 내고 터널 위 흙을 덮어 산을 잇는 복원공사중이다. 

이런 바람직한 토목공사는 보느니 처음이다. 

대형 트럭이 오가며 흙을 부리는 공사현장을 우회하지 않고 곧바로 질러갔다. 

사치재를 지나 복성이재로 가는 마지막 산길로 가파르게 접어든다. 



언젠가 산불이 있었을까? 큰 나무가 별반 없어 시야가 잘 터진다. 

천황봉을 중심으로 좌우로 길게 늘어선 만행산 능선이 제대로 보인다. 

전황봉.. 언제부터 그리 불렀을까. 맘에 안든다. 



지나온 산길, 운봉고원을 감싸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대간길이 한눈에 보인다. 

맨 오른짝 솟은 봉우리가 고남산이다. 



발 밑에 지리산 휴게소와 첨탑,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백두대간 남원 구간은 대부분 이런 솔밭 사잇길이다. 

다른 나무와 섞이길 거부하는 순수한 솔밭이 가도가도 끝이 없다. 



온전한 산 이름을 부여할만한데 없다. 

대간꾼들 사이에서는 아막산이라는 이름이 통용되는 모양인데 지도상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긴가? 이 다음인가? 하며 봉우리 몇개를 지나서야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 바로 아래 바위 하나 서 있어 남근바위라 이름붙여 놓았으나 전혀 안닮았다. 

배낭 벗어놓고 기술을 발휘하여 바위 위에 올라서야 조망이 터진다. 

시야가 열리고 지리산 주릉이 길게 늘어선다. 



아영고원, 제비가 물고 온 박씨로 대박 난 흥부가 살던 아을이 이 중간에 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은 함양 백운산 정도가 되지 않겠나 싶다. 앞으로 가야 할 길..





아막산성, 아영고원은 백제와 신라간에 영토분쟁이 심했던 지역이다. 

보자.. 삼국시대면 얼마나 오래된 산성인가? 그 옛날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었을 석성에 서린 선조들의 피땀을 본다. 



복성이재 가자 했더니 어리둥절해하며 앞장서라던 남원사람, "여기 짓재네요, 우리는 짓재라고 그래요"라고 말했다. 

'짖제'가 아니고 '짓재'가 맞겠다.



고갯길을 건너 대간은 이어지고 나는 세워둔 차를 타고 아영, 인월, 운봉 거쳐 여원재 지나 남원으로 간다. 



여원재 못미쳐 운봉읍내 살짝 벗어나 서 있는 '박봉양비', '갑오토비사적비'라고도 부른다. 

여러번 자빠졌는지 귀퉁이가 깨지고 암각된 비문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도로공사 중 땅 속에서 발견되어 박씨 후손들이 '박봉양 장군비'라 기단부에 새겨 다시 세웠다. 

박봉양이 외눈박이였던 모양이라 별호가 '일목'이다. 

박봉양은 운봉의 부자로 권세가 막강했으며 성격이 거칠어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했다 전한다. 

금을 수레로 실어나르며 중앙의 권세가를 섬겼으며 민영준에게 15만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했다. 

민영준이 누구인가? 대표적 탐관오리이자 민씨 일파의 거두로 청나라 원세개에게 군대를 보내 농민군을 진압해달라고 간청한 자이다. 훗날 민영휘라 개명하고 친일파로 변신하여 작위를 수여받았다.  

유유상종이라 했다. 박봉양이 농민군에 맞서 민보군을 조직한 것은 필경 자신의 재산과 낡은 지배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훗날 항일의병 활동을 했다 하나 철저히 고증해볼 일이다. 


남원 사람 말에 따르면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인월, 아영, 운봉, 그 중에서도 운봉 사람들은 여타 남원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기질이 있다 한다. 

여기까지..



남원 농민회 들러 차 한잔 얻어먹고 세숫대야에다 주는 양 많은 육개장으로 배 채우고 김개남포 농민군 주둔지 교룡산성에 들렀다. 


은적암터. 수운선사는 이 곳에서 동학의 정체성을 밝힌 '논학문'을 집필했다.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의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 들어

호호망망 넓은 천지 일신으로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대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 있네

만고명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혁명적 기세 드높은 '칼노래'도 이곳에서 지어졌다. 



저녁노을 또한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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