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시 집을 나서 복성이재 도착하니 다섯시 반, 집에서 점점 멀어진다. 오늘은 육십령까지 간다.

정월 초이틀, 쪽달조차 없는 밤하늘엔 별만 가득. 

쏟아지는 별빛을 담을 재간 없어 한참을 바라만 보다 산길로 접어든다. 

산길에 접어들자 무덤이 보이고 으스스한 기운이 일어난다. 

이런때는 그저 걷는 수밖에.. 

소나무 숲길을 지나 매봉에 다다르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간 양쪽 장닭들 앞다퉈 새벽을 알리니 아영고원 불빛 너머 여명이 비치기 시작한다. 



봉화산 정상에서 일출을 맞기 위해 부지런히 걷는다. 

늘 그렇지만 일출시각을 알고 가면서도 밝아오는 동짝 하늘에 마음이 과도하게 앞선다. 

너무 서둘렀을까? 오른짝 장딴지가 뜨끔하더니 통증이 온다. 

대간길에 나선 이래 가장 길게 잡은 구간인데.. 백운산 깔끄막 오를 일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봉화산 정상에 마춤하여 당도했다. 도착하자 바로 해가 떠오른다. 

해는 천왕봉에서 한참 왼짝으로 비켜난 자리에서 떠올랐다. 



몇날 며칠 분량을 걸어왔건만 아직은 천왕봉 그늘, 지리산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서로 길게 뻗은 지리산 주릉이 장엄하다.  



가야 할 길, 백운산과 장안산 사이에서 덕유산이 어서 오라 손짓한다. 

오늘 하루 점드락 걸으면 지리산 자락에서 벗어날 수 있으려나?

오늘 산행 마치고 나면 이병 계급장 떼고 일병 계급장 달아도 되지 싶다.  

작것 내손으로 떼고 붙이는거다. 

 


어지간하면 이름 하나 붙여주제만.. 이름없음이 이름이 되고 말았다. 

봉우리 앞뒤로 산불이 났던지 큰키나무가 사라지고 억새 무성한 조망 좋은 봉우리가 되었다. 



마지막이라 맘 먹고 지리산 한번 돌아보고 길을 재촉한다. 

이제 남원땅을 벗어나 장수와 함양의 경계로 접어든다. 

그러고 보니 그 많던 소나무가 사라졌다.


무명봉 내려서다 눈길에서 외약짝 발목이 뒤집힌다. 

발목과 함께 눈알도 뒤집힌다. 눈에서 불이 번쩍 튀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통증이 가라앉는다.  

십리도 못가 주저앉는다 해도 할 수 없다. 시큰거리는 발목이지만 다시 걷는다. 



광대치 지나 월경산 가는 길목, 철책이 삼엄하다. 

약초재배단지, 사람을 막는걸까? 멧돼지를 막는걸까? 

월경산 정상은 살짝 비켜 지나친다. 


아스라히 보이던 백운산이 눈 앞에 성큼



중재, 고갯길 못미쳐 내리막길에서 간단히 요기를 한지라 쉼 없이 그냥 지나친다. 

장딴지 통증도 거의 사라지고 외약 발목도 문제 없고 몸이 산에 잘 적응되었다. 

이 상태로 곧장 백운산을 올라 점심을 해결할 요량이다. 

짧지 않은 오르막길, 마음 속 신발끈을 질끈 동여맨다. 




어느덧 다 왔나 싶어 '에이 싱겁게 왔네'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본격적인 백운산 오름길이 시작되었다. 

만만치 않다. 정상 주변에 이르니 산은 온전히 겨울, 바람결에 날린 상고대가 바닥에 수북하다. 

이른 시간에 왔더라면 상고대를 볼 수 있었겠다.  


백운산 정상


90년대 후반 즈음에 오른 바 있는데 도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산행 후 계곡에 몸을 담그려다 어찌나 물이 맑고 시리던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포기했던 기억,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접한 기억 정도가 아스라하다. 

다시 오른 백운산, 건너편에 솟은 산 하나 유난히 눈길을 잡아끈다. 저런 산이 있었단 말이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우와..



괘관산(일명 갓걸이산), 그 이름으로 하여 함양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근 대봉산으로 개명되고 주봉인 천황봉은 천왕봉으로 개명되었다. 

천황봉 개명은 필시 일제잔재 청산 차원일 것이다. 산족보「산경표」에는 '천왕점(岾)'이라 표기되어 있다.  

岾은 땅이름, 절이름, 고개 등의 의미를 지닌 한국식 한자다.  

그런데 천황봉 또는 천황산이라는 지명 모두가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에 접한다.  

'천황'은 우리 전통신앙 속 옥황상제를 의미하기도 하고 상고시대로부터 널리 쓰여왔으며, 일제 강점기 이전 옛문헌이나 지도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이다.  

대간길을 걸어오며 의문을 제기했던 만행산 천황봉도 이에 해당한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신중하게 지명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인데 설득력이 있다.     

황제는 중국, 우리는 왕이라는 또다른 사대주의가 스며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도 있겠다.   

보다 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친일파들이 주름잡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백두대간이 복원되는 것도 한사코 꺼려왔다.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 산]이 그랬다. 





백운산과 영취산 중간 지점 작은 암봉에 올라 점심을 해결한다. 

문득 탄피가 눈에 들어온다.  

백두대간에 탄피라.. 

백운산은 영호남의 경계에 있으면서 지리산과 덕유산, 장안산 등 대간과 정맥을 잇는 주요 지점에 있다. 

이러저러한 크고 작은 전투가 한두번만 있었던 것은 아닐 터이다. 

누가 누구에게 총을 놓았을까? 매복하고 있었다면.. 그리 생각하고 보니 목을 지켜 매복하기 좋은 자리다. 



백운산과 자웅을 겨루는 장안산 주릉이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장안산은 족보로 치면 대간의 아들격인 정맥에 속한다. 

영취산에서 분지한 금남호남정맥이 무령고개 넘어 크게 솟구쳐 장안산이 되었다. 



영취산으로 가는 마루금이 평탄하게 깔려 있다. 능선 끝부분의 볼록 솟은 봉우리가 영취산이다. 



금남호남정맥 갈림길



거두절미하고 '논개생가'. 대간을 사이에 두고 생가와 무덤이 좌우에 있다. 

논개의 삶과 죽음에 얽힌 무수한 논쟁과 지자체간의 합종연횡을 본다. 


장안산에서 뻗어나가는 금남호남정맥 산줄기


선 굵은 백운산과 괘관산(대봉산)


논두렁 밭두렁에 동네 고샅길도 마다 않고 아슬아슬하게 맥을 이어오던 대간 줄기가 기지개를 켜듯 크게 몸을 일으켜세워 내가 바로 백두대간이라는 듯 위세를 과시한다.  

하지만 나는 대간길에 어울리는 폼나는 생각, 그럴듯한 사색을 하지 못한다. 

끊임없이 앞길을 막아서는 새로운 산봉우리에 한숨이 나오고 육십령까지의 남은 거리계산에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저 고갯길은 또 언제 넘나 하다가도 어느덧 등 뒤로 물러선 산봉우리에 미소가 절로 나오는가 하면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 문득 정신이 들기도 한다. 

하루 점드락 길을 걷으며 스쳐 지난 단 한사람, 안녕하시냐는 우리 민족 전래의 인사 한마디를 던지며 서로 쏜살같이 엇갈리고 말았으니.. 

백두대간은 참으로 고독한 길이다. 


장수덕유와 남덕유를 보며 남은 기운을 단전에 모은다.


백제와 신라, 이긴 편이 올라 승전고를 울렸다는 북바위


민령, 장안산과 그 너머 팔공산 줄기가 아스라하다.



깃대봉에서 변성명한 구시봉, 그 옛날 백제와 신라가 힘을 겨루던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이름을 버린 사연이 영 마뜩찮다. 

까마귀 똥일까? "똥조차 검을소냐" 무언의 항변.



좌백운 우장안, 거대한 새가 날개를 편 형상이다. 

'독수리 취'자를 쓰는 영취산 이름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드디어 육십령이 손에 잡힐 듯.. 그러나 2.5km 생각보다 멀다.



머리에 불을 달고도 한참을 걸어서야 육십령에 당도했다. 

7시가 넘었다. 30여km.. 많이 걸었다. 

육십령 고갯마루에서 반시간 넘게 기다리던 함양 사는 선배 형님과 반갑게 손을 맞잡는다.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해준 요람과 같은 '농어촌연구부' 하늘같은 선배. 애들농사에 배농사, 전교조에 농민회에 열혈청년으로 살고 계신다. 

덜커덩거리는 96년산 구닥다리 차를 타고 복성이재로 되돌아간다. 

산길에서 보았던 빼빼재 넘어 괘관산을 스쳐 지나간다.   


돌아오는 차 속 이러저러한 얘기 끝에 함양에 조병갑이 선정비가 있다 말씀하신다. 처음 듣는다. 

지난해 조병갑이 선정비를 철거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지지부진하게 되었다며 진보세력이 미약한 함양의 보수적 풍토를 개탄하신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보니 선정비가 천하의 탐관오리 조병갑이도 선정을 베풀 수밖에 없었던 양반고을 함양의 저력을 반증한다며 도리어 자랑거리로 삼자는 몹시 덜떨어진 주장까지 난무하고 있다. 지리산 문학관장이라는 인사가 1월 8일자 경남신문에 기고한 내용이다. 

이 자는 조선 말기의 극에 달한 매관매직과 삼정문란, 즐비한 선정비에 스민 백성들의 피눈물을 정녕 모르는걸까? 알고도 쌩까는 것일게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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