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력발전기 쌩쌩 돌아가는 삿갓골재 대피소, 산장의 밤은 따뜻했다. 

거의 찜질방 수준이다. 진짜로..

산에 온 것인지 술집에 온 것인지 모를 정도로 취해버린 일군의 산객들로 인한 다소간의 소란을 빼고는 모든 것이 쾌적했다. 

무룡산에서 일출을 볼 요량으로 6시가 살짝 넘어 길을 나선다.

아직 어두운 시각 오늘은 다시 혼자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잔잔하고 푸근한 날씨 구름이 많이 낀다 했다. 



장수덕유에서 남덕유를 거쳐 삿갓봉으로 이어지는 대간의 기세가 날카롭다. 

지나온 길과 달리 무룡산에 이르는 구간에서 대간은 부드럽고 넉넉해진다. 

그래 그리하여 덕유산이로구나..



삿갓봉에서 뻗어내린 두툼한 산줄기가 호랭이 등껍닥같다. 

대간과 정맥 사이에 낀 장수 방면의 자잘한 산들이 낮게 깔려 있다.  



무룡산에서 일출을 본다. 무룡산은 남덕유와 향적봉 중간 지점에 떡 하고 솟아 있다. 

일출이랄 것도 없이 동짝 하늘이 살짝 붉어진다 싶더니 구름 사이로 해가 살짝 보이고 싱겁기 짝이 없게 날이 새버린다. 



해는 거창 쪽에서 떠올랐다. 보이느니 울울첩첩이 산 뿐이다. 



돌탑을 쌓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

해봐야 뭘 알지.. 다음에 다시 돌탑을 만나면 나도 돌 하나 얹어봐야겠다.

 


지나온 무룡산, 호랭이 등껍닥만 보았을 뿐 춤추는 용을 보지 못했는데 예서 보니 치켜든 봉우리가 용머리로 보인다.   




장수덕유산에서 뻗은 길지 않은 능선, 그 앞에 삿갓봉에서 길게 뻗어나간 시루봉 능선, 그리고 무룡산 살짝 지난 무명봉에서 뻗어나간 망봉능선이 차례로 보인다. 

1954년 1월 망봉에서 방준표 전북도당 위원장의 항미연대와 국군 5사단 36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방준표 도당위원장과 부대원들이 모두 전사했다.  

방준표 사령관은 경남 통영 출생으로 전쟁 시기 전북도당위원장과 전북유격대 사령관으로서 전북지역의 중요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싸웠으며 당시 나이 48세였다. 

당시 망봉은 동쪽으로는 험준한 덕유 주릉과 연결되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절벽으로 길이 없고 오직 남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했다.

"무주로 통하는 기동로가 보이며 안성면 일대가 훤히 보이는 중턱의 절벽"에 사령부 아지트가 있었다 한다. 

골짝과 능선마다 쌓인 숱한 선혈과 사연을 감싼 채 눈 덮인 덕유산은 아무런 말이 없다. 



동엽령을 지나면서 까막딱따구리를 봤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하는 나무찍는 소리 요란하더니 검은새 한마리 날아가는데 영락없이 까막딱따구리. 

설마 하는데 대간 좌우에서 암수가 호응하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전화기 속 저장된 까막딱따구리 소리를 들려주니 반응한다. 까막딱따구리가 틀림없다. 

덕유산에 까막딱딱구리가 있군.. 인터넷을 뒤지니 "2002년 태풍 루사 이후 자취를 감췄던 까막딱따구리가 다시 발견되었다"는 새전북 신문 기사(2008년)가 검색된다. 덕유산 까막딱따구리라.. 반갑기 그지 없다. 


그건 그렇고 백두대간은 동엽령 지나 백암봉에 이르러 주봉인 향적봉을 눈 앞에 두고 주릉을 벗어나 동짝으로 방향을 튼다. 

금원산, 기백산을 비롯한 경남의 산들이 보인다. 



주릉을 벗어난 대간길이 둥글둥글한 봉우리들을 넘어 빼재(신풍령)를 향해 달린다. 




주릉에서 벗어나 주릉을 본다. 거대한 호랭이 한마리 잔뜩 웅크린 형상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웅혼한 기상이 발산된다.  



산과 산 사이 골짜구니를 비집고 사람이 산다. 

멀리 지리산 주릉이 희미하게 보이는 이 골짝에는 또 얼마만큼의 피눈물과 절절한 사연들이 쌓여 있을까?



눈 덮힌 산길을 헤쳐나간다. 

외약 끝 산너머로 오늘의 종착지 삼봉산이 빼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여기서부터 2.5km, 신풍령이 머지 않았다. 

그런데 2.5km.. 간단치 않다는걸 오늘도 절감한다. 



빼재, 수령, 신풍령, 이름도 많은 고갯길, 대간 줄기가 무자비하게 잘려 있어 산길을 빙빙 돌아 내려와야 했다.

88고속도로 사치재처럼 대간을 다시 잇는 매우 바람직한 토목공사가 필요한 곳이다. 



라면 끓여먹는 내내 차 한대 지나다니지 않아 이상하다 했는데 길이 이 모양이다. 

대간길은 고갯마루에서 거창 쪽으로 상당히 내려선 곳에서 다시 이어진다. 



삼봉산을 넘으며 드는 생각..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 

신풍령에서 오르는 삼봉산은 유순하게 시작해서 날카로운 암릉 넘어 무지막지한 내리막길로 곤두박질치는 강한 뒤끝을 보여준다. 

과히 시간 걸리지 않고 넘을 수 있겠다 싶었으나 백두대간에는 에누리가 없다. 

눈으로 보는 어림짐작으로 속단해서는 안되겠다. 



덕유삼봉산, 삼봉산은 아직 덕유산의 영역인가보다. 



삼봉산에서 보는 덕유산은 이렇듯 분명한데 덕유산에서 삼봉산 가늠하기는 어찌 그리 어려웠을까?

아직 가보지 않은 산이었으니 그랬겠지. 



좀 있으면 해가 지겠다. 붉은 노을이 장관이겠는데 더 이상 머무르기가 어렵다. 

급한 내리막길에서 붉게 물드는 하늘을 얼핏 보았을 뿐이다. 



무주 방면 산줄기 속에 숨은 꼬부랑길, 오두재가 보인다. 

전주 방면에서 무풍가는 길에 네비 틀어놓고 무심코 운전하다보면 저 길로 안내한다. 

지름길이긴 하나 막혀 있는 경우가 허다해서 되돌아가야 하는 골탕을 먹곤 하는 길이다. 

나를 태우러 오던 순창농민 정룡이도 저 길로 오다 다시 돌아서 왔다고 투덜거린다. 

그러니 너무 기계에 의존해선 안된다. 



다음 차에 가야 할 길. 

초점산, 대덕산 넘어 삼도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인다. 

삼도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무지막지한 내리막길로 해가 넘어갔음에도 땀이 난다. 

내리막길 2km, 내려가는 동안 날이 저물고 이번에도 머리에 등 걸고 한참을 걸었다. 

막바지 소사고개에 이르는 길은 넓다란 고랭지 밭을 끼고 간다. 

고랭지 밭에서 잠시 한눈을 팔았을까? 산길샘이 경로에서 벗어났다고 신호를 보낸다. 그러고 보니 표지기가 보이지 않는다. 

밭을 가로질러 직진하다 보면 다시 만나겠다 싶었는데 급기야 또랑을 뛰어넘고 말았다. 

밭을 타고 내려오다 왼쪽 언덕으로 붙어 산길을 탔어야 했다. 

대간길에서 또랑을 건너다니 있을 수 없는 파격이다.  

하지만 날이 저물었다. 

다음 차에 길 잃은 곳에서 대간길을 다시 잇기로 하고 고단한 산행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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