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잘 잤다. 대략 9시간을 죽은듯이..

네시 반, 라면 하나 끓여 엊지녁 얻어놓은 식은밥 말아 후루룩 먹어치운다. 

주섬주섬 채비하고 길을 나서니 다섯시 반. 

산 너머 하늘이 왜이리 밝나 했더니 서짝 하늘에 달 걸린 모양이다. 

한시간은 넘게 걸어야 다시 능선에 올라설 수 있다. 

어두운 산길, 올빼미가 운다. 

어지간하면 등골이 오싹할 소린데.. 무척 반갑다. 

지난번 남원 교룡산성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서도 등 뒤에서 올빼미가 울었더랬다.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고 약수터에서 물 받고 나니 동짝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언제나처럼 마음이 급해지지만 차분히 오를 일이다. 



아뿔싸! 해가 떠오른다. 

삼도봉 100미터 전방..



그래도 과히 늦지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오늘은 혼비백산하지 않는 차분한 산행이 될 수 있겠다. 

가야산 봉우리가 둥실 솟았다. 




덕유산에서 달려오는 대간 줄기, 대덕산에서 뻗어나간 수도기맥 줄기, 대덕산을 중심으로 날개를 펼쳤다. 

우익이 좀 더 굵고 실하다. 대간이니까..

백수리산 지나 삼도봉으로 달려오는 대간의 기세가 사뭇 맹렬하다. 


대간을 타면서 만나는 세번째, 그리고 마지막 삼도봉. 

지리산과 초점산 삼도봉이 다소 불완전한 것이라면 여기야말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고 갈리는 제대로된 삼도봉이라 하겠다.

주변 산세 또한 치열하기 짝이 없다.  


가야산


덕유주릉, 삼봉산, 대덕산, 백수리산



삼도봉에서 길을 나선다. 

이제 전라도 땅과는 영영 이별이다. 

그러나 산길은 매양 마찬가지, 그러려니 하고 가던 길을 갈 뿐이다. 

대간은 석기봉 지나 민주지산 각호산으로 이어지는 굵은 산줄기를 뒤로 하고 오른짝으로 이어진다. 

오전 내내 오른편에서 가야산이 나를 지켜보며 따라다녔다. 



물한계곡과 해인리를 넘나드는 삼마골재를 지나자 사람들 발자욱이 뚝 끊겨 사라진다.  



꽤 깊이 쌓인 눈길에는 이제 다양한  짐승들 발자욱 뿐이다.

나지막한 산에서 많이 보이던 맷돼지 발자욱은 보이지 않는다. 

새발자욱만 대략 짐작할 수 있겠다. 

눈이 살짝 꺼진 걸로 봐서 꽤 무게가 나갈 것이며 이처럼 차분히 걷는 녀석이라면 필시 들꿩일 것이다. 

나머지는 모르겠다. 모다 자잘한 녀석들이지 싶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했더니 족제비 발자국일거라 한다. 

이렇게 높은 산에 족제비가 있냐 했더니 "가리왕산 꼭대기에도 있어요~"라고 말한다.



밀목령을 지나며 지나온 길을 더듬어본다. 향적봉, 삼봉산, 초점산, 대덕산, 백수리산 등이 뚜렷이 구분된다.  




석교산 못미쳐 1172봉에 서니 사방 경계가 훤히 터진다. 

오는 내내 시야가 가려 답답하던 민주지산 방향이 활짝 열려 주릉이 훤히 잡힌다. 

시원한 조망을 선사하는 착한 봉우리에 그럴 듯한 이름 하나 붙여줄 법 한데 이름이 없다. 



질매재(우두령)로 오르는 도로가 보이고 오른짝 멀리 황악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황악산 너머 괘방령까지 간다. 

저 멀리 있는 산도 이제는 좀 만만하게 적응이 된다. 



석교산을 바라본다. 

산길을 타다 보면 푹 꺼졌다 다시 솟구치는 건너편 봉우리를 바라보며 한숨짓기 일쑤다.  

하지만 막상 가다보면 산은 시시각각 달리 보이고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하면 발로 걷는 것이 쉽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른들은 가장 게으른 것이 눈이라 했나 보다. 

보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산은 몹시 달라보인다. 


橫看成嶺側成峰 가로 보면 고개, 세로 보면 봉우리

遠近高低各不同 멀고 가까운 곳 높고 낮은 곳, 보는 곳 따라 다르네


대간을 걷다 보니 내가 외우고 쓸 줄 아는 유일한 중국 한시, 소동파가 읊은 싯구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이건 방에 앉아서 지어낸게 아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나머지 두 구절은 다소 견해가 다르다. 

산의 진면목은 산 속에 들어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고 나는 본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리취 중에 가장 멋드러진 자태를 보여준다.  

이처럼 꼿꼿이 서서 겨울을 나는 수리취는 꽃말이 '장승'이다. 

야들은 이렇게 겨울을 나고 봄이 되어야 비로소 꽃씨를 날리나보다. 



지나온 길 다시 한번 더듬어보고..



석교산을 넘어..



질매재로 내린다. 

질매재 가는 길은 편안한 내리막길이 이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질매재는 동물이동통로를 이용해 건넜다. 

그리 건너지 말라 팻말 써 있지만 여기까지 오는동안 충분히 짐승에 가까워졌고 이 시각 이동통로를 이용하는 다른 짐승은 없어보여 그리했다. 



질매재를 건너니 시멘트로 포장된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 

눈 많고 질퍽한 산길, 쉬어가기 딱 좋다. 

바람도 없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쬔다. 

고도가 낮아지고 날이 풀리니 신발에 물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명색이 고래텍슨데 젖은 눈길에서는 한나절을 간신히 버틴다. 


자 이제 황악산만 넘으면 괘방령이다. 

잔여구간 12km, 눈길이라 속도가 나질 않는다. 대략 여섯시간 잡고 저녁 8시쯤 돼야 도착할 수 있겠다. 

괘방령산장에 전화 걸어 방 따땃하게 뎁혀놓으라 주문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삼성산에 올라서니..



황악산이 지척이고,



직지사에 속한 삼성암이 내려다보인다.



바람재에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단절하고 있던 폐군사시설물을 2010년 철거하고 지형 및 식생 복원한 지역으로 백두대간 생태복원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폐기물 가득한 큰크리트 지하벙커, 막사 ,물탱크 등을 철거하고 복원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군사시설은 지난 70년대 초 미군이 사용(통신기지로 추정)하던 것으로 지난 4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 한다. 

녜미헐놈들이 지들 필요에 따라 쓰고 효용이 없어지니 그냥 나가버린 거다. 놈들이 버린 폐기물, 망친 생태는 우리 돈 들여 복구하고..

미 대사 습격사건에 지랄발광을 해대며 난리부루스를 추는 꼴통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이런 꼴을 당하고 살아야 되나 싶다. 

사진에 보이는 목장터 역시 산림으로 복원하는 모양인데 이미 복원이 개시된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바람재 지나 황악산(비로봉)에 오르는 능선길에 수많은 까마귀들이 떼지어 날아다닌다. 

해질녘 일석점호중인 모양인데 나는 아직 길 길이 멀다. 



정상석 참으로 구성대가리 없다. 크기만 하면 단가?



지나온 길 다시 한번 가늠해보고..



여시골산으로 접어든다. 

옛날부터 여시가 그렇게 많았다네. 

막 사람 될락 하는 착한 여시 하나 앵기면 쓰겄다. 




날이 어두워지고 여시굴을 지난다. 

달은 구름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능선길이 으스스하다. 

착한 여시고 뭐시고 나오면 까무러치겄다 생각하는 찰라 여시 우는 소리가 들린다. 진짜로..

윽.. 다시 들으니 올빼미 소리다. 한마리가 아닌데.. 최소한 두마리 이상의 올빼미가 운다. 

오늘은 시작과 끝이 올빼미 소리다. 

이때 여시가 때맞춰 울어주면 완전 전설의 고향인데.. 여시 우는 소리는 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다 사람 되야부렀으까? 요새 여시같은 것들 많더만..

올빼미 소리 한번 들어보시라. 






여시골산에서 내려서는 길은 몹시 가파르고 조잡한 나무계단으로 발 딛기가 사납다. 

내림길에서 다시 한번 외약 발목이 뒤집힌다. 역시 눈도 뒤집히고.. 이번에는 못일어나는 줄 알았다. 

여기서 내 기어이 여시밥이 되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또 괜찮다. 이놈의 발목은..

한가지 교훈을 더 얻는다. 

다 왔다 방심말고 끝까지 안전산행!

7시 40분, 괘방령 산장 도착. 


괘방령에 걸린 대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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