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석대들 전투는 혈전이었다.

농민군들은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자울재를 넘어 남쪽으로 퇴각하며 옥산촌 전투와 월정 전투를 치른다. 장흥 전투는 1주일간의 승리에 뒤이은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의 32일간의 기나긴 토벌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들의 추격으로 흩어졌던 농민군 500~600명이 대거 덕도로 운집하자 16세 소년 윤성도를 비롯한 덕도 주민들이 밤을 이용해 남해안 주변 섬으로 농민군들을 모두 분산 피신시켰다.

[동학농민혁명군 장흥부 덕도 탈출도]는 전투에 패한 동학농민군이 범선을 이용해 탈출하는 장면을 형상한 작품이다. 이후 이들은 한 명도 붙잡히지 않았고 덕도 주민들 또한 토벌 과정에서도 모두 무사했다 한다. 조선 감점 이후 이들은 의병투쟁으로, 무장 항일투쟁으로, 섬에서 혹은 어느 산하에서 이름도 없이 산화해 갔을 것이다. '의병의 절반은 비류(농민군)'라는 당대의 기록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민군의 조직적 탈출은 패배가 아닌 투쟁의 연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완의 동학농민혁명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한번 크게 패배하여라! 그리하여 영원히 승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