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 사이에서는 농업회의소법 입법 여부가 이슈이고 화두인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농민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대다수 농민들은 “농업 회의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농업회의소에는 ‘민관협치’ ‘반민반관’ ‘협치농정’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이를 잘 운영하고 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정부 시절 시범사업으로 시작되어 오늘날 법제화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고창은 2차 시범지역으로 선정되어 2012년 11월 농어업회의소가 설립되었다. 그로부터 5년 고창군 농어업 회의소는 무엇을 남겼나? 그저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그 누구도 농어업회의소를 거론하지도 찾지도 않는다. 그러니 고창은 실패한 사례인 셈이다. 법제화가 실현된다면 다시 살아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살아난다 한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농민의 자주적 요구로부터 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업회의소는 형식상 농민이 주도하고 행정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행정이 주도하고 농민은 그저 들러리를 섰을 뿐이다. 이는 회원가입원서를 거주지 읍면사무소 산업경제 담당 부서에 제출하도록 한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적이 잘 오르지 않을 경우 이장과 담당 공무원을 통해 의도치 않게 회원가입이 된 경우도 허다할 터이다. 그저 시범지역이 되었으니 설립된 것이지 농민들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에 더해 고창군 농어업 회의소는 농어민들로부터 제기되는 각종 현안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행동했다. ‘반민반관’에서 ‘반관’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회의소 대표는 준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모든 사안으로부터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그에 걸맞게 자신의 활동폭을 제한했다. 이런 태도는 농민들의 눈에는 행세하려는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일말의  작은 관심과 지지마저 스스로 거둬들인 셈이다. 

고창의 예는 극단적인 실패 사례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농업회의소법 입법 추진이 고창의 경우와 다를 바 없이 실패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다고 판단한다. 진정 농민을 위한 것이라 한다면 농민이 먼저 알게 하고 농민의 자주적 요구를 추동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미 누더기가 되어 애시당초의 설립 취지와 기능마저 무색해진 법안을 기어이 통과시키고야 말겠다는 섣부른 시도는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농협의 모습을 놓고 보더라도 명백하다. 조합원의 근본 이익에는 아랑곳 않는 관제화된 농협의 모습은 애시당초 잘못된 출발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한번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거대 조직을 바로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진정 농업회의소가 잘 되길 바란다면 좀 더 차분해져야 한다. 하다못해 8개 시범지역에 대한 구체적인 실사와 해당지역 농민들의 구체적인 평가라도 청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는 농업회의소법이 아니라 헌법 개정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 지난 세월 무시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한 농업의 근본문제를 헌법에 올곧게 담아내어 농업회생과 농민생존, 농촌발전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제껴야 한다. 소탐대실하지 말자. 30년만의 개헌이며, 최소한 향후 30년 우리의 운명을 가름할 사안이다. 농업과 농민의 근본 이익을 염두에 두고 ‘농민헌법’ 개정 운동에 모든 힘을 모으자.

(한국농정신문 9월 25일자 농정춘추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