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가시거든 가시리에 가보시라. 

가시되 교래리 산굼부리 지나 녹산로를 타고 가시라. 
가시리가 나는 참 좋다. 가시리에 가야 비로소  "아.. 여기가 제주도로구나"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가시리는 참으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주도 어느 한 곳 예외가 있겠는가마는 그중에서도 가시리는 4.3.. 항쟁과 피의 학살 그 한복판에서 중산간 마을 중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다. 
"제주도민을 다 죽이더라도 제주도를 확보하라" 이것은 미국의 명령(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가 경무부장 조병옥과 국방경비대 사령관 송호성을 불러놓고 지시)이었다. 

당시 자행된 어마어마한 학살극의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가시리의 올레, 올레를 전라도식으로 표현하면 '고샅'이 되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껄막으로 이어지는 고샅길을 '올레'라 한다. 
석대네 집 껄막으로 이어지는 올레, 집주인은 이런 올레 흔치 않다고 자랑한다.   
토벌과 학살의 핏빛 잿더미에서 다시 재건된 마을 가시리, 가시리 사람들은 실로 강인한 분들이었나 보다. 

 

 

어제의 숙취를 그대로 간직한 석대와 함께 '이덕구 산전'을 찾아 나선다.
이덕구 산전은 사려니 숲길을 통해 찾아들어가는 것이 편하다. 

그 언젠가 사려니 숲길이 관광용으로 개발되기 전 봄, 꽃을 찾아 들어간 적이 있었다.
숲 바닥이 온통 복수초로 뒤덮여 있던 아찔한 기억이 선명하다.

 

 
 

1949년 2월 4일 제주읍 동부 8리 대토벌을 계기로 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봉개리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더욱 산속 깊이 들어갔으며 이곳 '시안모루', '북받친밭'까지 와서 은신 생활을 했었다. 이 곳은 피난 주민들이 떠난 1949년 봄 이후에는 무장대 사령부인 이덕구 부대가 잠시 주둔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곳 일대를 '이덕구 산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곳엔 당시 움막을 지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고 음식을 해 먹었던 무쇠솥과 그릇들이 그대로 널려 있다.

'북받친밭'이라는 지명이 주는 어감이 사람을 비감케 한다.

 

 
 
 
 

 

가시리 감귤 몇 개, 고창에서 가져온 붉은 복분자술 몇 잔 부어드렸다. 

 

 

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 
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
까마귀 소리 사이로
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
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
돌 틈새 나무뿌리 사이로
복수초 그 끓는 피가
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

 

 
 
 

 

산전에서 나오는 길, 표지기를 찾았지만 없다. 
가시덤불에 절벽 나올 일 없으니 그냥 간다.

성판악 방향을 가늠하여 천미천을 오른쪽에 끼고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면 되겠다. 
사람의 길인지 짐승의 길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길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길과 아닌 것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는 내를 건너 찻길로 내려올 수 있었다. 

성판악 3km 전방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터덜터덜 걸어 사려니 숲길 초입으로 되돌아간다. 
앞서가는 석대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그날 저녁 자리에 누운 석대가 말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그런 장소에 잘 안 가는데.. 오늘 많은 생각이 들었다"라고..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도 그때 희생되었다"라고..
석대가 말한 제주도 사람들은 그 날의 상처를 고스란히 가슴에 얹고 살아가는 희생자 가족들을 말하는 듯했다. 
몹시 미안해졌다. 당사자 앞에서 뭘 안다고..

 

 

돌아오는 날 비행기 떨키고 찾아간 관덕정..
놈들은 이덕구 사령관의 시신을 관덕정 광장에 전시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소설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우린 아직 죽지 않았노라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노라
내 육신 비록 비바람에 흩어지고
깃발 더 이상 펄럭이지 않지만
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
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
까마귀 소리 사이로
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
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
돌 틈새 나무뿌리 사이로
복수초 그 끓는 피가
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고
우리는 싸움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노라고
우리는 여태 시퍼렇게 살아 있노라고

- 김경훈 「이덕구 산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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