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고대했다. 
달뜨기 능선 우로 떠오르는 달을 보자는 것이 이번 산행의 이유가 되겠다. 
보름을 넘겼지만 달은 오히려 더 둥글어졌을 것이다. 
여기는 윗새재 마을, 치밭목에서 하룻밤 머물고 천왕봉 들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계획이다. 

그런데.. 비가 내린다.
지리산에 비가 내린다. 
기나긴 가뭄 통에 귀하신 비를 만나다니.. 
기이한 인연이로다. 
달을 볼 수 있을까?

소나기가 맞나 생각될 무렵 비가 잦아든다. 
때는 지금이다. 산으로 든다. 
가다 맞는 한이 있더라도 출발은 상쾌해야 써. 

무재치기 폭포 부근 조망대에서 다리쉼을 한다. 
비는 그쳤으나 숲은 흠뻑 젖었다. 
땀이야 비야 나도 젖었다. 
마음도 흠뻑 지리산으로 젖어든다. 

치밭목에 이르는 다소 가파른 구간에서 아들녀석 허벅지에 문제가 생겼다. 
쥐가 난단다. 걸음이 몹시 느려진다. 
어둑해져서야 대피소에 도착, 저녁을 먹는 사이 다시 비가 내린다. 
달 캥이는 별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생수병에 담아온 소주 한병 노나묵고 잠을 청한다. 
대피소 안은 덥고 습하다. 

새벽 두시경 볼일 보러 나선 대피소 마당,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달을 본다.
상쾌한 바람에 구름 몰려다니고 달이 들락날락.. 별도 보인다.
주섬주섬 챙겨 밥 끓여먹고 길을 나서니 세시 반, 예정보다 30분가량 늦었다. 

중봉, 먼동이 터온다.
천왕봉까지는 900여미터, 일출까지는 20여분 남았다. 
천왕봉 포기, 차분히 중봉에서 일출을 맞기로 한다. 
계속 구름이 올라온다. 변화무쌍..
일출을 볼 수는 있겠는지, 어떤 일출이 될 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잠깐. 서쪽으로 기우는 달을 본다. 
이런 달을 보자는 것이 어니었는데..

해가 뜬다. 아니 태어난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새로 태어나듯 해가 생겼다. 

붉게 달아오르다가

이내 찬란해진다.

사라졌다 생겨났다를 반복한다. 
해는 떠오르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언다. 
콧물이 흐른다. 젖은 눈썹 끝 얼음이 달리는 듯, 춥다 추와..

아주 잠깐 천왕봉이 살짝, 단 한번..
다시는 보여주지 않았다.

거대한 성채같은 천왕봉

잠깐씩

맛만 보라고..

에잇.. 치사해서 그냥 가불란다.
하봉, 영랑대 거쳐 두류봉, 청이당재 지나 다시 새재 마을로 돌라갈란다. 

모싯대, 동자꽃이 한창이다.

영랑대를 오른다.

우와! 암것도 안보여..
너라도 웃어야 쓰겄다.

난장이바위솔을 본다. 
산오이풀은 늙어 사진기에 담기 민망하다.
구름이 걷히기를 고대하며 시간을 죽인다. 

보여달라! 보여달라!
한시간여를 기다렸지만 지리산은 끝내 웅자를 드러내지 않았다. 
치밭목과 써리봉, 하봉의 모습만 보여준다. 아주 잠깐..
지리산의 아량, 네가 어디서 왔는지나 알아라 하는 듯..

모싯대

두류봉에서

두류봉을 백여미터 앞두고 오른쪽으로 빠졌어야 했다.  
전화기에서 자꾸 무슨 소리가 난다 했더니 경로를 벗어났다는 경고음. 
다행히 두류봉까지는 가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정밀하게 되짚어보니 이미 두류봉을 지나 국골 사거리에 임박하고 있었네..
행여 구름이 걷힐까 다리쉼을 하며 사진을 찍던 곳, 두류봉이었네..  
왕복 400여미터 알바.. 차라리 조금 더 나갔더라면 국골 사거리를 만나 좀 더 편하게 길을 갈 수 있었겠다. 
구름 속 오리무중 산행에 길 감각이 영.. 두류봉을 애도는 희미한 길에서 다시 한바탕 알바.. ㅋㅋ

좀 투덜거리는 듯..

버섯은 그 이름을 알자고 감히 덤비기조차 엄두가 나질 않는다. 

바위떡풀은 잘 알겠는데..

두류봉 부근 능선길, 작은조개골 상부에서 시야가 트였다.
줄곧 구름 속에 숨어 있던 웅석봉과 달뜨기능선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조개골과 쑥밭재 언저리에 마련한 비트에서 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고향생각을 했다는.. 
이북 출신 빨찌산들이 이름 붙였다는 달뜨기..

거친 길, 수월치 않다. 
올라오는 길, 허벅지 때문에 고생한 녀석이 이번에는 물팍이 아파 걸음을 걷지 못한다. 
흡사 아픈 코끼리, 넘어지고 자빠지고..
산에 추미 좀 붙이라고 애써 데려왔는데 영 정 떨어지고 말겄다. 
그렇다고 산길에 에누리는 없는 법, 한발 한발 축내지 않고는 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윗새재 마을에 당도하니 오후 세시 반, 꼬박 12시간.. 고생했다. 

나는 다시 기회를 엿봐야겠다. 
달뜨기 능선 너머로 떠오르는 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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