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처음 몽골에 다녀왔다.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지금 뭐라도 기록을 한 가지는 남겨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몽골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그런만큼 사진도 많고 할 말도 많고..
무엇보다 자신의 무용담을 중심으로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것이 사람인지라 내가 만난 여우 이야기를 먼저 풀어야겠다 마음먹는다. 
"늑대 보러 간다" "늑대 이빨을 뽑아오겠다" 큰소리 쳤지만 그 꿈이 실제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늑대가 실제 살고 있는 곳에 간다는 것만으로도 실로 가슴 뛰는 일이었다. 

이런 내가 숨소리조차 들릴만한 지근거리에서 여우를 대면하게 된 것은 최현명('늑대가 온다' 저자) 선생의 현명한 영도에 따른 것이다. 그분의 가장 큰 지침은 "혼자 다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지침에 철저히 따랐다.
밥 먹고 술 마시고 잘 때를 제외하고는 나는 늘 혼자 행동했다.  
이른 새벽 혹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나 홀로 숲을 뒤지고 바위산에 올라 초원을 굽어볼 때면 마치 내가 늑대가 된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약 일주일 몽골에서 보낸 야생의 정점에서 비로소 나는 여우를 만나게 되었다. 
어설픈 첫 경험이지만 감히 선생의 저서를 흉내내어 글 제목을 달아놓은 것은 선생에 대한 내 나름의 존경의 표현이다.  

 

여우를 처음 본 것은 무슨 호숫가로 근거지를 옮기던 날이었다. 
우리는 달리는 차 속에서 초원을 달려 굴 속으로 몸을 숨기는 여우를 발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피해 초원을 에돌아가는 여우를 볼 수 있었다. 
여우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저녁을 먹고 다시 그 자리에 가봤지만 날은 어두워지고 여우는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이른 새벽 숙소 앞 초원을 찾았다.
지금까지 들어가보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초원지대, 모래언덕도 있고 낮은 구릉이 움펌짐퍽 이어져 몸을 낮추면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볼 일 보기 딱 좋은 그런 곳이었다. 

양과 염소, 말들이 밟아놓은 어지러운 발자국들 사이 새로 찍힌 선명한 발자국이 보인다.
살쾡이 발자국인가 싶었다. 
발자국을 따라 이리저리 뱅글뱅글 도는 동안 안개가 몰려왔다. 
여기저기 튀어나오는 째깐한 새들을 쫒다가.. 발자국을 보다가..  
나중에 보니 내 발자국이 정처 없이 어지럽게 찍혀 있더라.
예가 어디쯤인지 방향이 분간되지 않는다. 

그러기를 두시간 가량..
순간, 불현듯 여우가 나타났다. 
달아나던 여우 녀석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순간이었던지, 잠깐이었던지.. 사진기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번 더 여우를 만났지만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그저 하염없이 여우가 사라진 초원을 바라볼 뿐..
더 이상의 추적은 부질없겠다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숙소로 돌아가며 생각한다.
나갔다 올 때마다 늑대를 봤다 뻥을 쳐놔서 이제는 여우를 봤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텐데 어쩌나..
그런데 다행히도 나 말고도 숙소 주변에서 여우를 본 사람이 더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본 발자국이 다름아닌 여우 발자국이었음을 최현명 선생이 인증해주었다. 
해 질 무렵 다시 여우를 찾았으나 보지 못했다. 
다만 사람도 비집고 들어갈만한 굴을 발견했다.
혹시 늑대굴이 아니겠는가 물었더니 여기는 늑대가 있을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과, 그 정도 굴이라면 대를 이어 굴을 이용하는 타르박(마못)이 주인일 거라 말씀하신다. 

다시 하루가 가고 이제 초원을 탐사할 수 있는 마지막 아침이다. 
어디로 갈 것인지 살짝 고민되었지만 다시 그 짝으로 간다. 
어찌 됐건 기본으로 삼세번은 질러야 조선 사람이다. 

이제는 에돌거나 머뭇거릴 것이 없다. 
짐작되는 곳을 향해 직진하며 발자국을 찾는다. 
그런데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발자국만 보인다. 
발톱이 안 찍히면 고양잇과라 했는데 이거야말로 살쾡이 발자국인가 싶었다. 
발자국을 쫒는데 고양이 싸남내는 소리가 들린다. 
하 이건 살쾡이네.. 그래 살쾡이라도 보자 하고 이제는 소리를 추적한다. 
하지만 소리는 어느 순간 뚝 그치고 만다. 
돌아 나오는 등 뒤에서 또 소리가 들리고 앞으로 나가면 그치고..
도무지 소리로는 위치를 가늠할 수 없겠다 싶어 다시 발자국을 찾는다. 
오늘도 역시 내 발자국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을 쫒다 드디어 굴을 찾았다. 
그저께 보았던 여우굴에 비해 입구가 좁다. 
역시 살쾡이굴이 맞다 생각했다. 

굴 주변에 싼지 얼마 되지 않은 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단 한번이지만 굴 속에서 희미하게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살쾡이 굴이라는 확신 속에 잠복을 결행한다. 
아직 한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다. 
굴에서 15~20미터 정도 물러나 자리를 잡았다. 
바람이 맞은 편에서 불어온다. 좋다.
사진기도 무음으로 돌려놓고 숨을 죽인다. 

적막한 시간이 흐르고.. 머릿속에 잡념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저것들 아침밥 묵고 똥까지 싸고 들어갔으면 낮 동안에는 계속 자는 게 아니겠는지..
과연 저 굴 속에 뭇이 들어 있기는 한 건지..
한 시간이 다 돼가는데 이제 일어나야 되는 게 아닌지..
순간 뭔가가 언덕을 넘어 들어왔다. 
녀석도 나를 봤을까? 납작 배를 깔고 엎드린다. 

저 풀포기 사이를 지나 굴 입구로 다가올 살쾡이를 머릿속에 그리며 겨눠 총 자세로 고도의 격동상태를 유지한다.  
고요하던 굴 속에서도 반응이 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놈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다시 온갖 의혹이 너울대고 좀이 쑤시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 자세를 풀고 문득 고개를 드니..

 

어라.. 맞은편 언덕에 여우가 나타났다.
여우다. 여우가 온다. 어슬렁어슬렁..
이건 뭐지? 때깔로 봐서는 아까 언덕을 넘어 들어온 녀석이 맞다. 
그런데 왜 살쾡이가 아니고 여우란 말인가? 굴 속에서는 여전히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데..
어찌 됐건 여우가 눈 앞에 나타났다. 
음.. 뒤태를 보아하니 암컷이로군..

개처럼 앉아 발로 낯바닥을 털고 주위를 살짝 둘러보더니 다시 이동해서 아주 자리를 잡는다. 
나와의 거리가 좀 더 좁혀졌다. 
분명 사진기를 응시하는 듯한 눈초리가 여러 장의 사진으로 남았는데 이 녀석 나를 본 건지 못 본 건지 알 수가 없다. 

 

여우란 놈, 눈이 게슴츠레해지더니 이내 잠에 빠져든다. 
오 위대할손 나의 은신술이여..
너는 아직 꼬랑지 하나뿐인 둔갑술도 모르는 풋내기 여우지만 나에게는 50년 묵은 은신술이 있다. 
아.. 그런데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 부러 몸을 높이며 부스럭거린다.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여우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마치 애시당초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여우의 이 시선이 나를 보는 것이었는지. 내 너머의 다른 무엇을 보는 것이었는지..

돌아오는 발걸음이 너무나도 가벼웁다. 
굴 속 살쾡이고 지랄이고 여우 봤으면 됐지 뭘 더 바랜단 말인가?

돌아와 궁금증과 의혹을 해소한다. 
어제 본 것이나 오늘 본 것이나 다 같은 여우 발자국이라는 것, 땅의 상태에 따라 발자국의 형태도 다르게 남을 수 있으니 발톱 자국이 있냐 없냐 하는 도식에 빠지면 안 되겠다는 것. 
굴 입구에 있는 똥의 내용물을 볼 때 딱딱한 곤충 껍질이 많이 섞여 있는데 곤충은 여우가 즐겨 먹는 음식이라는 것.
마눌(살쾡이)은 소리를 거의 내지 않으니 사나운 고양이 소리는 여우 새끼들 먹이 다툼하는 소리였을 것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굴 속에서 나던 고양이 소리가 듣기에 따라서는 낑기리는 강아지 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역시나.. 사진만으로도 현장 상황을 꿰뚫는 선상님의 명쾌한 설명을 듣고 나니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비로소 정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