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여행, 환상방황
야동 전문가가 기획한 야생에서의 하룻밤, 이름하여 '불편한 여행'. 야생동물과의 만남, 천수만 살쾡이가 표적이라 했다.
저 건너 잔솔밭에 야영 자리 봐 두고 간월호 양편을 한 바퀴 휘돌며 새들을 본다. 해 질 무렵 돌아와 무인 카메라 설치하고 텐트 치고 밥 먹고..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술이 과했다. 그것도 몹시..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자다 새벽녘 소변보러 나섰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구신에 홀린 듯 족히 두어 시간은 헤매다 희뿌연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다시 텐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향을 가늠하며 기를 쓰고 길을 찾았으나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도는 마법에 걸렸던 모양이라, 이른바 환상방황(環狀彷徨)..
끊임없이 걸었으나 도무지 천지분간이 되지 않았다. 달랑 반팔 티 하나 입고 있었다.
문득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했다.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어렴풋 깨달았다. 이번에는 어디가 나오건 끝까지 이 길 따라 앞으로만 가자 하고 걸었다.
온갖 추리 끝에 뒤로 돌아 걸었던 듯하다. 분명치 않다. 좌우튼 그러니 나오더라.
텐트에는 다시 들어갈 형편이 못되었다. 차에서 잠을 청했다. 차 안이 덥혀지는 동안 얼마나 떨었던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그리하여 이튿날 계획은 몽땅 뭉그러지고 말았다.
적막한 들판, 스산한 길바닥 위에서 27년 전 밤이 떠올랐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밤, 변산반도 고사포에서 송년회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눈이 맞았다. 술자리를 벗어나 눈을 맞으며 들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얼마나 낭만적이었던지. 그런데 숙소로 돌아갈 수 없었다.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길을 찾아 하염없이 걸었다.
그때는 둘이었다. 그러니 따뜻했지, 심지어 가슴은 뜨거웠다.
하지만 천수만의 밤은 다소 끔찍했다.
잔솔밭에서는 부엉이가 밤을 새워 울었다.
아마도 칡부엉이였을 게다.
저 건너 잔솔밭, 내가 헤매인 궤적을 그릴 수 있다면..
북극성을 감도는 애기별 같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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