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니 새벽 두 시, 너무 일찍 눈이 떠졌다.

빨아놓은 옷들이 다 마르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잠든 탓이다.

다시 잠들기 어렵겠다 싶어 몇 가지 일을 하다 보니 네 시, 미리 받아놓은 만 원짜리 비싼 밥 챙겨 먹고 행장 챙겨 길을 나선다. 

04시 40분, 달빛 교교한 산골 동네 고샅을 더듬어 산으로 향한다. 

집집마다 문 개들이 이리 많은지..

오사허게도 짖어싼다.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든다. 

길 가의 돌탑, 내려올 때도 부처로 보이더니 오를 때도 부처로 보인다. 

 

주치봉(06시 20분)

봉암사에서 설치한 가시철망 삼엄한 은티고개 거쳐 조망 없는 주치봉, 매우 가파른 오름길이지만 산행 초반이라 쉽게 올랐다. 봉암사는 무슨 경계가 그리 삼엄한 지..

 

막 파놓은 듯한, 야생동물 전문가는 오소리 똥굴이라 하더라.

여기에 똥을 퍼질러 싸놓고 작은 곤충들과 그 곤충들을 좋아하는 동물들을 유인한다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더니..

똥이 다시 밥이 된다. 

 

은티마을

악휘봉에서 시루봉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이 은티마을을 폭넓게 휘감아 돌고 크고 작은 계곡들이 부챗살처럼 은티마을로 향한다. 

대간에서 마을로 내려서는 산길만 너댓군데, 은티마을은 여기저기서 물이 콸콸..

 

08시

역시 조망이 없다. 

하지만 좀 더 진행하면 조망이 팡팡 터지는 험준한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눈 앞에 희양산 암봉이 펼쳐진다. 

희양산과 백두대간이 내려뜨린 산자락 깊숙히 봉암사가 자리하고, 멀리 가은읍 일대는 무슨 강이라도 흐르는지 물안개가 자욱하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등산객 말고 약초꾼, 버섯을 따러 왔다는데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고..

 

조망터를 지나고 나니 암벽 사이로 급경사 내리막, 밧줄 붙잡고 내려가다 그만 사진기가..

배낭끈에 부착된 거치대에서 분리되어 급경사 비탈길을 우당탕탕, 뭐가 그리 급했는지 20여 m를 앞장서 굴러 내려간다.  

거치대에 제대로 꽂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찌 어찌 사진기는 찾았으나 렌즈는 동강나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지고..

흙 털고 쓰다듬어 망원렌즈 달고 셔터를 누르니 속 없이 또 사진이 찍힌다. 

이따금 떨어뜨려봐서 안다. 내 사진기 맷집 좋다.

 

사진기가 남긴 마지막 사진, 자신의 운명을 알았을까? 다소 묘한 분위기로 찍혔다. 

수리센터 보냈으니 멀끔해져 돌아오겠지..

 

 
 
 

거대한 바위가 지붕을 이룬 바위 틈새기를 비집고 들어가니 관짝보다 조금 넓은 네모 반듯한 석실, 마치 고인돌 내부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어느 시대 어떤 한 사람 여기 누워 조용히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아늑하고 압도적인 분위기, 천혜의 비박 터..

 

지름티재를 지나 희양산을 향한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됐다. 

인내와 끈기, 체력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묻더라. 

대답 없이 한발 한발 쉬엄쉬엄 오른다. 

 

새벽 두 시에 이화령을 출발했다는 단체 산행객 들을 만났다. 

현재 시각 9시 20분, 그러니 7시간이 넘게 걸렸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나 이런 식의 야간산행은 왜 하는 겐지.. 바삐 사는 탓이려니 한다. 

 

희양산 정상은 대간에서 살짝 비켜 있다. 

왕복 1km 살짝 안 되는 거리, 여기는 반드시 다녀올 필요가 있다. 

정상 부근 암릉이 선사하는 압도적인 조망은 버리미기재와 이화령 구간 산행의 백미라 할 만하다. 

나는 여기서 한 시간 가량을 머물렀다. 

아~ 가슴 벅찬 조선의 산하여.. 

내 시인이라면 시 한수 절로 뽑겠더라만..

 

침략의 피 서린 밤이
이 나라에 칭칭 걸치였으니
새날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
헤여 보라 몇 만이나 되는고?
어느 고개 어느 골짜기에
어느 나무 어느 돌 밑에
이름도 없이 그들이 묻히였노?
이 나라의 초부들이여
부디 삼가 나무를 버이라 ㅡ
우리 선렬의 령을
그 나무 고이 지키는지 어이 알리,
부디 삼가 길옆에 놓인 돌 차지 말라 ㅡ
우리 선렬의 해골이
그 돌 밑에 잠들었는지 어이 알리

- 조기천 '백두산' 中 

 

잠깐 눈도 붙였다. 

 

 
10시

정상의 조망은 과히 좋지 않다. 

 

산성터를 지난다. 

왜 쌓으려 했던 건지, 어찌하여 쌓다 말았는지..

 

배너미 평전(12시)

산중 숙박을 고려했던 곳, 능선 바로 옆 졸졸 흐르는 시냇가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사초 무성한 자갈밭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 

무심코 따라간 표지기는 시루봉으로 향하는 것이었고 본래 길로 질러간다는 것이 그만..

그런데 돌아와 살펴보니 애당초 가던 길이 보다 정확한 제 길이었던 것이다. 

좌우튼 길은 이내 찾았으나 이번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하~ 이러다 비 맞은 땡초 되는 건 아니겠는지..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만봉으로 향하는 길 능선 왼쪽으로 펼쳐지는 미지의 산들, 정체가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아마도 대간의 다음 구간이 아니겠는지..

 

13시 40분

봉우리들이 죄다 조망이 없거나 시원치 않다. 

다행히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가보면 알겠지, 어떤 산들인지.. 

 

가은읍 방면
14시 5분

이름 좋다 곰틀봉, 곰넘이봉을 지나온 곰이 보금자리를 틀었을까?

 

곰틀봉 지나 육중한 능선 너머 대간이 쫙 갈라진다. 

오른짝 능선이라 생각했으나 반대였다. 

외약짝 능선 높은 봉우리가 백화산, 백화산 지나 대간길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이미 지나온 대간길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리게 된다.  

오른짝은 뇌정산.

 

백두대간이 매우 유순한 내리막으로 길게 뻗어 있다. 

그 뒤로 아까 봤던 미지의 산들이 나래비 서 있다.

그러니 이화령 너머 다음 구간에 만나게 될 산들이 맞다. 

 

백화산(16시 30분)

이번 구간 가장 높은 고지에 올랐다. 

예서 이화령까지 7.3km, 시간을 가늠해 본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에서 나가야 한다. 

이제부터 속도전, 속도를 배가한다.

 

 

골짝을 사이에 두고 대간이 달린다. 

외약짝이 지나온 길, 오른짝이 나아갈 길, 멀리 희양산이 보인다. 

 

17시 10분

백화산 지나 에기치 않게 암벽 구간을 잠시 지났으나 전반적으로 완만한 내리막, 역시나 조망은 없다. 

 

 
 
18시 20분

누군가 넘어뜨렸다. 새 되야부렀다. 

기력이 없어 그대로 두고 왔다.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 

게으른 놈 석양에 바쁘다는 말 하나도 그르지 않다. 

 

18시 50분

이화령 도착,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7.3km 두 시간 20분, 5년만 젊었어도 두 시간 이내에 끊을 수 있었겠는데..

역시 늙었다. 

 

짤막한 터널 지나 서짝 하늘을 보니..

 

백두대간 버리미기재-이화령 구간을 지나 비로소 속리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속리산 국립공원은 무슨 치마폭이 그리 넓던지..

생각해 보니 대간길을 밟으면서 처음으로 농민회원의 도움 없이 차량 이동 문제를 해결했다. 

직선거리 9.7km 도상 거리 33km, 참으로 무지하게 휘돌아치는 구간이다.

중간중간 비탐 구간에 다소 험악한 바위구간 하며 봉암사에서 둘러친 삼엄한 가시철조망까지..

쉽지 않은 구간을 무사히 마쳤다. 

다시 시동 걸었으니 최소한 몇 차례는 이 가을 안에 다시 찾을 것이 분명하다. 

적어도 강원도 땅을 밟는 것으로 소심한 목표를 세워 본다.

이 가을에 나는..

 

 

은티고개-이화령.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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