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항쟁? 처음 들었다. 지난겨울이었네..
아~ '이재수의 난', 고개를 주억거렸더랬다. 
허나 영화 제목으로나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 아는 바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내년이면 120주년이라는데.. 
인터넷을 뒤져 대략의 전모를 파악하고 '변방의 우짖는 새'를 주문했다. 

신축항쟁은 반제 반봉건 민중항쟁이었다. 
천주교를 앞세운 제국주의 침탈과 봉건 지배세력의 늑탈에 맞선 위대한 항쟁이었던 것이다. 
면면이 이어내려온 제주 민중 항쟁의 역사는 4.3으로 연결되었다. 
신축 항쟁의 전모를 알아갈수록 4.3이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다른 한편 동학농민혁명과는 그 어떤 연결고리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주의 동학당이 사포에 상륙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초기 줄포에 머무르던 왜인이 작성한 [전라고부민요 일기]라는 이름의 보고서('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권)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 자는 필시 밀정이었을 것이다. 하니 그 일기라는 것은 명백한 첩보문서에 다름 아니다.
상륙 시점은 갑오년 3월 24일(음력), 무장에서 기포(3월 20일)한 농민군이 고창, 흥덕 거쳐 고부로 물밀듯 짓쳐들어가 관아를 접수하고 백산으로 집결하던 때다.
사포는 줄포와 지척에 있으며 흥덕현에 속해 있다. 
하여 생각해 본다. 이것이 조직선 없이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기록은 단지 이 한 줄 뿐이다. 그 규모가 얼마인지, 그들은 이후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끊일 듯 끊이지 않는, 때가 되면 일어나고, 일어나 때를 만드는 우리 민중 불굴의 투쟁사에 대한 보다 실체적인 확인이 필요했다.  
도연맹 수련회 일정 속에 신축 항쟁 역사기행을 넣고 제주에 연통을 넣었다. 
그리하여 역사와 문화 예술인이 어우러진 품격 높은 답사단이 구성되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이었다. 

자 모두들 광청리로 갑주
임술년 강제검의 난리도
방성칠의 난리도 광청리에서 일어났수다.
- 문무병(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옹기종기 집들이 들어앉아 골목마다 정담이 흘러 넘쳤을 마을이 텅 빈 밭이 되었다. 

동광리(무등이왓)는 약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화전을 일궈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관의 경제적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농민봉기인 1862년 임술민란(강제검의 난)과 1898년 제주민란(방성칠의 난)의 진원지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제의 탄압에 반대하여 일어났던 1918년 보천교(普天敎) 사건의 중심적인 지역이다.
도탄에 빠진 화전붙이들을 이끌고 동학의 교리를 심어 사무친 원한의 섬 백성들에게 자기 땅에서 살 권리가 무엇이며 생존의 값어치가 무언인가를 뼛속 깊숙이까지 일깨워준 방성칠 하르방, 팔십 노구에 하얀 수염을 날리며 쩌렁쩌렁 물 그린 사람 물을 주고, 밥 그린 사람 밥을 주는 것이 인륜의 도리라든가,
의지할 곳 없고, 압박받고, 굶주린 사람 모두 구름같이 몰려나와 남학당이 되었다. 
- 문무병(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농민혁명의 연대가 저물고 조일 연합군의 토벌에 밀린 일단의 농민군이 해남에서 진도를 거쳐 제주로 도항한다. 
그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무등이왓과 같은 중산간 화전 마을은 육지에서 넘어온 외지인들이 정착하기에 안성마춤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또한 갑오년 이전 이미 제주도에 들어온 방성칠 '남학당' 세력의 주요 활동 근거지이기도 했으니.. 
혹여 혁명 초기 사포에 상륙했다는 제주도 농민군이 남학당 사람들일 수도 있겠고 그들 중 일부가 살아 돌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또한 제주에 들어온 농민군들이 숨 죽여 살며 목숨이나 보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공출, 징용, 징병 등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적 수탈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동광리 사람들은 8·15 해방을 맞으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자치적인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일제 식민지가 남기고 간 가난과 정치적 공백을 신속하게 메꾸어나갔다. ‘해방은 바로 공출이 없는 세상’ 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그들에게 해방이 되어도 일제 식민지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계속되는 공출에 대한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다. 동광리 사람들의 보리 공출 반대는 마을의 진정한 해방을 만들어가기 위한 항쟁의 시작이었다. 

무등이왓 사람들은 또 이렇게 수 차례의 농민봉기를 넘어 4.3의 주역이자 잔혹한 학살의 희생자로 역사에 그 자취를 남기고 사라져 간 것이다. 


자원 장두 이재수 출정하다.

신평당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어르신네 내 비록 배운 것 없고, 가진 거 없는 종놈으로 태어났지만 의를 위해 죽는 데는 반상의 구별의 어실 거우다. 나, 나를 탐라 백성의 방패막이로 삼아 주십서
......
천하에 무식한 무지막지한 스물다섯, 나라 건지고자 이 한 목숨, 할마님 전에 바치옵니다. 
우리 인간 생명 죽어지면, 한 줌의 흙으로 탯줄 사른 땅에 묻히는 법 아닙니까, 
이 토란잎에 이슬 같은 목숨. 할마님이 거두어 줍서 
......
이 청원하고 원통한 스물다섯에게 신명을 내리여 군문이 열리듯 제주 성문을 왈그랑 댕강 열어 저 외지 귀신들을 내쫓게 하여 줍서. 
- 문무병(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장두 이재수가 출정에 앞서 이 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장두'로 나선다 함은 곧 목숨을 내걸고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었다. 
이재수가 장두로 섬으로써 항쟁은 무력에 의한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였으며, 대정의 화전민을 중심으로 한 빈농이 주축을 이룬 이재수의 서진은 마지막까지 강경한 전투태세를 유지하며 항쟁을 이끌게 된다. 


대정 삼의사 비

대정 삼의사비

신축항쟁의 세 장두, 강우백·이재수·오대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1961년 홍살문 거리에 세웠으나 마모되고 초라해져 1997년 4월 20일 대정고을 연합청년회가 새로 세웠다.

** 비의 전문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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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제주에 포교를 시작한 천주교는 당시 국제적 세력이 우세했던 프랑스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면서 그때까지 민간 신앙에 의지해 살아왔던 도민의 정서를 무시한 데다 봉세관과 심지어 무뢰배들까지 합세하여 그 폐단이 심하였다. 신당의 신목을 베어내고 제사를 금했으며 심지어 사형(私刑)을 멋대로 하여 성소 경내에서 사람이 죽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이에 대정고을을 중심으로 일어난 도민 세력인 상무회는 이 같은 상황을 진정하기 위하여 성내로 가던 중 지금의 한림읍인 명월진에서 주장인 오대현이 천주교 측에 체포됨으로써 그 뜻마저 좌절되고 만다. 이에 분기한 이재수·강우백 등은 2진으로 나누어 성을 돌며 민병을 규합하고 교도들을 붙잡으니 민란으로 치닫게 된 경위가 이러했다. 규합한 민병 수천 명이 제주시 외곽 황사평에 집결하여 수차례 접전 끝에 제주성을 함락하니 1901년 5월 28일의 일이었다. 이미 입은 피해와 억울함으로 분노한 민병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도 수백 명을 살상하니 무리한 포교가 빚은 큰 비극이었다.

천주교 측의 제보로 프랑스 함대가 출동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도 찰리위사 황노연이 이끄는 군대가 진입해와 난은 진압되고 세 장두는 붙잡혀 압송되어 재판 과정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장두들은 끝까지 의연하게 제주 남아의 기개를 보였으며, 그들의 시신은 서울 청파동 만리재에 묻었다고 전해 오나 거두지 못하였다.

대정은 본시 의기 남아의 고장으로 조선 후기 이곳은 민중봉기의 진원지가 되어왔는데, 1801년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그의 아내 정난주가 유배되어 온 후 딱 100년 만에 일어난 이재수 난은 후세에 암시하는 바가 자못 크다. 1961년 신축년에 향민들이 정성을 모아 제주 대정군 삼의사 비를 대정고을 홍살문 거리에 세웠던 것이 도로 확장 등의 사정으로 옮겨 다니며 마모되고 초라하여 이제 여기 대정고을 청년들이 새 단장으로 비를 세워 후세에 기리고자 한다.


나의 아들을 어디로 보내어
나의 간장을 끊는고

제주영웅 이재수 모 송씨 묘. 안성, 보성, 인성 3리 주민들이 비를 세웠다.
모슬봉 기슭, 한라산이 구름 속에 들었다.

유명무실한 제주 목사의 비석은 곳곳마다 세워 있건마는 어찌하여 도탄 중에 들어있는 일반 백성의 원을 풀며 인정 바로 잡아주는 나의 아들의 비석은 없으며, '이재수전'이라 하여 내 아들의 행적 잡지는 사람마다 받아 읽은 말이 있지마는 그 사람들이 어찌하여 나의 귀 밑에서는 읽어 알려주지 아니하느냐?
지금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 이 세상에 살어 있나 죽어 있나? 내 아들을 내가 죽어 하늘나라로 돌아가면 만나볼 수 있을까? 답답하다. 이 세상 사람들 나의 아들을 아무 죄도 없이 어디로 보내어 나의 간장을 끊는고?"
눈물로 시작한 사랑 눈물로 저물고 
어둑어둑 청파동 그 어디쯤
그대 버혀진 머리 바람에 흔들리며 
이재수야 이재수야
시퍼런 하늘 새로 열 날벼락 꿈꾸지만
백년이 다 되도록 찬비 맞을 뿐
이재수야 이재수야
......
한라산 감도는 구름도
제주섬 휘감는 바람도
너를 알고 너를 부른다 너를 알고 너를 부른다
돌아보지 마라 아이들아
징을 울리고 장구 소리 울려라
바람은 지나온 길 돌아보지 않는다
바람의 아이들아 바다가 키워낸 아이들아
제주도 사람은 죽어서 바람이 된다

민군 주둔지 황사평(황새왓)

항쟁 당시 민군이 주둔하여 제주성을 공략하던 황사평은 이제 당시 희생된 성교꾼(천주교인)들의 묘역으로 치장되고 천주교인들의 공동묘지로 확장되었다. 
이는 법국(프랑스)의 외교적 강압에 따른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 외에도 천주교측 피해 배상금 5,160원을 요구하였고, 1904년 제주 삼읍 인민들에게서 6,315원(이자 포함)을 끝내 거두어 갔다. 

황사평 순교자 묘역 뒤편 후미진 곳에 자그마한 조형물이 서 있다. 
신축항쟁 120주년을 맞아 천주교와 항쟁 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세운 '화해의 탑'이다. 
이 탑이 이 자리에 자리하기까지의 내막을 알 수는 없으나 그 진정성이 그다지 엿보이지 않았다. 
천주교 측에서는 신축 항쟁을 '신축교안(敎案)'이라 하는 모양이다. 
'교안'은 종교 문제로 말미암아 벌어지게 된 사건 ·사안을 뜻하는 역사용어라 한다. 교회 측의 일방적인 수난을 강조하지 않은 것이기에 이야말로 올바른 역사적 정명이라 주장하더라. 
'교안'이라는 울타리에 가둬 항쟁의 기치와 정신을 훼손하고 어줍잖은 화해의 손짓으로 과거의 흑역사를 덮어버리려는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더라.   
답사자들은 제주 사람을 형상한 조각상의 오뚝한 콧날을 문제 삼기도 했다. 


관덕정에서 기행을 마무리하다.

관덕정에 얽힌 제주 민중의 역사를 해설하고 있다.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들풀 같이
마른땅에 뿌리 뻗어 자자손손 이어온
세월은 돌이켜 보면 참으로 험한
가시밭이었다. 뼈만 앙상한 자식새끼들, 
담 돌보다 무정하게 흙에 뒹굴고, 애비는
죽창을 들고 여기 모관까지 왔다. 
승리의 나팔 불며 가지고 돌아갈 것은 
단 한 번 느껴보는 뜨거운 자유가 아니더냐? 
내 손으로 원수의 배를 짓밟고, 
이 죽창으로 원수의 간을 뽑았다. 
- 문무병(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관덕정은 '제주 역사의 앞마당'이라 할 만하다. 
신축항쟁 당시 제주성을 장악한 민군들은 관덕정 마당에서 천주교인들을 처단했다. 
현대에 이르러 4.3의 도화선이 된 3.1절 발포 사전이 터진 현장이기도 하며, 4.3의 장두 이덕구 사령관의 시신이 전시되기도 했다. 

뿔뿔이 흩어지는 군중들, 그러나 당당하게, 
장두답게 재수는 관덕정 마루에 올라 외쳤다. 
어르신네들, 내 말 들읍서.
이제 우리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싸움은 
이 한 목숨 버리면 그만이주만 태 사른 땅에 
의지가지없는 어린것들은 배곯아 울고,
늙은 할망은 병들어 누웠수다. 우리가
오늘, 이, 다 이긴 싸움을 그만두는 것은
배고프고 병든 식솔들을 살리는 일이고
조상의 땅을 지키는 일이라 마씸
모두들 집으로 돌아갑서. 헤어지는 마당에 
서러운 것은 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저 불국 잡귀들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우다. 다시는 우리 땅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꺼우다. 
이 재수의 눈알은 죽지 않고 살아서
제주 땅을 넘보는 
축산이들을 지켜볼 꺼우다. 
날랑 죽건 펄에나 묻엉...
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 문무병(날랑 죽건 닥밭에 묻엉..)

세 장두를 포함한 40여 명의 관련자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세 장두는 노량진에서 처형되었으며, 그들의 시신은 청파동 만리재에 묻혔다 전해올 따름이다.  

전농 전북도연맹 신축항쟁 역사기행 답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