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대풍구미(대풍감)의 바람과 압도적인 풍경, 하늘을 날던 매까지 모든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태하령 옛길을 걸어 넘으려던 계획을 바꿔 버스로 이동한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포항에서 배가 출항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타고 나갈 배가 없어진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사동을 지나 도동으로 가 차를 빌렸다. 차는 저동에 있었다. 
이제 먹어야 했다.

꽁치 물회를 먹자고 찾은 집, 울릉도식 꽁치 물회는 물이 없다. 그리고 전혀 비리지 않고 맛있다. 
예전 울릉도 사람들은 강고배를 타고 나가  손으로 꽁치를 잡았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유래된 음식이니 맛이 깊을 수밖에 없겠다.
저동 어민식당, 이 집은 울릉도에서 우리가 두 번 찾은 유일한 식당이다. 
뒤늦은 후회지만 마지막 날 아침에도 우리는 이 집으로 갔어야 했다. 

삼선암
송곳바위
코끼리바위
칼바위
현포

덤으로 얻은 시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우산국의 흔적을 더듬기로 했다. 여행은 역사기행으로 전환되었다. 섬을 반시계 방향으로 휘돌아 현포로 달린다. 
현포는 우산국 초기 도읍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관련 유적이 산재해 있다 했다. 
현포의 우리말 옛 지명은 검은작지(거문작지)다. 작지는 작은 자갈을 뜻하는 전라도 흥양 방언으로 남해안과 제주 등지에 폭넓게 남아 있다. 
바닷가에서는 몽돌해변, 산중으로 가면 자갈밭(한라산 선작지왓)을 의미한다 보면 되겠다.  

 

울릉현포동고분군(蔚陵玄圃洞古墳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포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돌기둥열 유구는 국내에서 발견된 예가 없는 것으로 의례나 제의를 위한 시설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돌기둥들은 함께 출토되는 토기조각들로 보아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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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포에 산재한다는 고분군을 찾아 나섰다. 현포리 고분군은 우산국의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포는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완만한 경사지가 발달해 있다. 
고분군은 대풍구미에서 멀지 않은 구릉지 밭 가운데 있었다. 
본래 40 여기, 지금은 10 여기가 남아 있다는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뿐이다. 

고분 내부로 들어가 보았다.  
출입제한 등의 아무런 관리 조치가 없으니 자연스레 행해진 일이다. 
울릉도 고분의 특징은 돌로 시작해서 돌로 끝냈다는 것이다. 
비록 껍데기뿐이지만 천 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위태롭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분에서 바라본 전망

남서리 고분을 찾아 고개를 넘는다. 
고개를 오르다 현포리를 돌아본다. 
그래 여기에 우산국을 통치한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단 말이지..

 

울릉남서동고분군(蔚陵南西洞古墳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상북도 기념물 제72호. 지정면적 39만 6,498㎡. 남서동은 울릉도의 성인봉 서사면에 위치하고, 고분들은 성인봉의 주능선에서 남서쪽으로 뻗어내린 지릉 사이의 계곡에 분포하고 있다. 1957년국

encykorea.aks.ac.kr

고분은 남양에서 좁은 골짜기를 거슬러 오른 엄청난 비탈지에 있었다. 태하령 넘어 걸어내려 오고자 했던 곳이다. 
평탄한 석실을 만들기 위해 많은 양의 바위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갔어야겠다. 
남양 일대에는 우산국 우해왕 관련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했다. 
투구바위랄지, 비파산이랄지..

 

골짝 입구 우산국 박물관을 찾았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 곳곳에 이끼가 끼고 녹이 슬어 방치되어 있다.  
지어놓고 개관은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른 박물관, 기념관은 잘 운영되고 있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국립박물관에는 일제가 반출한 우산국의 금동여래입상이 수장돼 있다 한다. 
그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한다. 
우산국 하면 떠오르는 것은 신라장군 이사부, 세종실록 지리지..
마치 야만의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면서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지는 않은가? 
우산국은 그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보조 장식일 뿐인 것인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 의종(1159년) 당시 심찰사 김유립 등이 울릉도를 답사한 '촌락이 일곱 군데, 석불과 철종 그리고 석탑이 있었다'는 등의 보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울릉도 오딧세이, 전경수 지음]에서 인용).
울릉도에 산재한 고대 유적에 관한 많은 자료들에서 전면적인 정밀조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조사 이래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 그런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무관심과 방치 속에 우산국의 흔적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는 남양에서 소주 한 잔 마시고 학포 바닷가 민박집에 들었다. 
학포는 1882년 고종의 명을 받든 검찰사 일행이 처음 당도한 곳이다. 
나는 11년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간 행정과 주민들이 관광 쪽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 모양이다. 
흥성거리던 오징어잡이도 고수익의 약재 농사도 다 지난 옛일이 돼버리고 늙은 삭신으로 기대할 것이라곤 관광 말고 달리 방안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울릉도의 현실이 투영되어 있다. 
비 내리는 바닷가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늦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학포는 일몰이 좋은 곳이다.
내리던 비가 그치고 일몰을 보여 주었다. 
나는 일몰의 구름 속에서 묘한 녀석을 보았다. 이무기? 개?
그리고 내일도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다는 이토록 잔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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