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면서 잦아들었다. 
촤르륵 촤르륵~ 돌밭을 구르는 파도소리 차분한데 오늘도 배는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린다. 내일은 들어오겄지, 암만..
학포는 먹을 것이 없다. 
나리분지 씨겁데기술로 목을 축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석포 독도 전망대에서

석포 죽도 전망대 전경
죽도

독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11년 전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죽도를 봤는데 관음도로 오인했다.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거대한 와불, 관음보살을 떠올렸던 것이다.  


석포 일출 일몰 전망대에서

관음도

관음도는 일찍이 '방패도'라는 이름으로 수토사의 기록에 나타난다. 
관음도는 총독부가 제작한 조선지형도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본래 이름과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울릉도의 지명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다양한 경로를 거치게 되는데 토속 지명이 한자로 차자되는 과정, 일본인들에 의해 음차되는 과정에서 전혀 엉뚱하게 변한 예가 허다하다. 
그러니 오늘날 관음도라는 섬 이름에서 관음보살을 연상하는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다. 내가 죽도에서 관음보살을 연상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당초 관음도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죽도에 대한 내 첫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석포 일출일몰 전망대 전경
딴바위


기상청 오늘 울릉도 날씨는 종일 비, 하지만 비구름이 몰려오고 몰려가는 것이 자유분방하다. 울릉도 비는 흩뿌리고 다닐 뿐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울릉도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요새 역할을 했다. 러시아 주력 함대가 울릉도 근해에서 침몰하였다. 
석포 일출 일몰 전망대는 당시 일본군이 망루를 설치했던 곳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내수전 전망대에서

 

울릉도 밭의 경사는 경이적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사람들이다. 이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내수전 일출 전망대에서 바라본 저동
관음도
죽도
북저바위


내수전 고인돌

내수전 고인돌

 

고인돌 - 디지털울릉문화대전

[정의] 경상북도 울릉군에 분포하는 청동기시대의 묘제. [개설] 청동기시대의 묘제는 석관묘·옹관묘·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 양식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ulleung.grandculture.net

 

고인돌과 토기 - 매일신문

울릉읍 저동3리 내수전 마을에서 발견된 고인돌(支石墓). (사진위) 북면 현포리에서 발견된 맷돌종류의 갈판(碣石)과 울릉도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2점. 울릉도서 고인돌·무문토기등 ...

mnews.imaeil.com

울릉도 고인돌을 검색하고 추적하여 찾은 곳이다. 
아무런 표지판도 관리도 안 되는 곳이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 
이 고인돌은 "본토보다는 약간 늦다고 추정되는 청동기시대(기원전 1900~300년) 또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300~1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음을 확인해 주는 증거" 중 하나다. 

내수전 전망대로 올라가는 진입로 초입 도로 아래 경작되지 않는 묵정밭에 고인들이 있다. 
고인돌 아래 비를 피하던 염소들이 불청객을 맞아 자리를 뜨고 있다. 
고인돌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를 보고 밭주인이 나왔다. 밭주인은 인근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다. 어디서 나오셨냐고 묻는다. 어디서 나온 건 아니고 그냥 관광객이라 하니 행정 당국에 대한 이러저러한 불만을 토로한다. 
때마침 나팔 나팔 날아다니던 나비 쳐다보느라 뭐라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저동에서

학포에서 출발해서 시계방향으로 섬을 절반 넘게 돌아 저동으로 왔다. 
독도 새우를 먹어보자 마음먹었으나 아직 장사 전이거나, 문을 닫아걸었거나..
도동 시가지를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쭉 훑었으나 결국 짬뽕에 소주..

안평전

봉래 폭포를 가보자 길을 나섰으나 당도한 곳은 안평전, 내비가 조화를 부렸다. 
저동으로 돌아와 숙소 잡고 한 숨 자고 일어나 독도 새우를 먹고자 했으나 다 팔려 영업 종료, 하여 울릉도에서 먹어볼 것 다 먹어보았으나 독도 새우만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어제 갔던 어민 식당에서 소주 한 잔 진하게 걸치고 나오니 저동에 밤이 도래하였다. 

단 두 척의 오징어배가 밤바다를 밝히고 있다. 
저동의 최전성기는 오징어잡이의 최대 전성기였던 1970년대 초반이었다 한다.
땅 한 평에 200만 원이 넘고, 개도 지폐를 물고 다니던 시절.. 
예나 지금이나 파도는 쉴 새 없이 철썩이건만..

달이 떴다. 아직 보름이 아닌데 보름달로 보인다. 
달빛과 별빛과 행남 등대의 불빛이 교차하고 있다. 
행남이라는 지명이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울릉도의 기구한 역사가 보인다. 

*沙工浦(「鬱陵島」) ̄□南伊(<鬱陵島圖>) ̄竹浦(1882-b) ̄沙公南(1900-b) ̄沙工南(1902) ̄沙工南(샤쿠나미)(1906-a) ̄샤쿠나미(1906-b) ̄砂空南末(Shakunami Kutsu)(1909) ̄沙工里(사공넘이, 『지지』) ̄沙空南末(샤쿠나미구쓰)(1911) ̄(杏南)(살구남)(1917-b) ̄沙空南未(1919) ̄沙工넘이, 杏南洞(1923) ̄사공넘어(살구남, 杏南), 사공남방 89(1928) ̄杏南(살구남)(1961) ̄사구내미(蛇口南)(1969) ̄사구나미(살구남, 蛇口南, 杏南)(1979) ̄杏南, 竹浦(1981) ̄살구남(1983) ̄杏南(살구남, 蛇口南, 竹圃)(1989) ̄사구내미·사구너머(2007) ̄행남(살구남) (현재)
- 울릉도 마을 지명의 형성과 고착 과정(유미림 한아문화연구소)

사공넘어(사공넘이)라는 토착 지명이 왜인들의 귀를 통해 살구나무로 왜곡되고 그것이 다시 한자로 행남이 되기까지..
'사공이 넘어갔다 혹은 넘어가는 곳'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한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었다는 둥, 겨울에도 살구꽃을 볼 수 있다는 둥 그럴듯한 유래를 만들어내 지명을 합리화시키고 그것이 버젓이 유통되고 정설로 굳어진다. 
이것은 명백히 지명에 남은 식민의 잔재다.  어디 울릉도뿐이랴..

촛대바위
 

울릉도에서의 마지막 밤, 저동의 밤이 깊어간다. 
우리는 단 한 번 이 어둠 속에서 성인봉을 알현하였다. 
감회가 교차한다. 
내일이면 간다네~
지새지 말아다오 저동의 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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