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전 산에 올라 조망 좋은 봉우리에서 해를 맞이하고 다시 날이 어둑할 때까지 산을 탔더랬다. 
그리 산을 타면 하루 산행거리가 30여 km를 넘나들었다. 
불과 5~6년 전의 일이었는데 이제는 새벽에 길을 나서는 것조차 쉽지 않다. 
언젠가 죽령에서 만나 소백산을 타 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어디만큼 오셨어요?" 
"워매, 나 아직 이불 속인데.."
어찌나 미안헸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오랜만에 새벽 산행을 해보자 맘먹고 잠이 들었으나 엎치락뒤치락 꼼지락거리다 보니 한낮이 되어간다. 
구절재를 향해 길을 달린다. 
칠보 소재지 허름한 뒷골목에서 보석 같은 식당을 발견했다. 
언제고 칠보에 갈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이 집에 다시 갈 것이다. 
구절재에 당도하니 정오, 짐을 꾸려 출발한다. 
오늘은 속도 위주로 산길을 타보자 맘먹고 배낭에서 망원렌즈를 슬그머니 빼놓았다. 
검은이마직박구리가 아니라 붉은부리찌르레기 혹은 갈색날개뻐꾸기가 나타난다 해도 무시하고 나는 내 갈 길을 갈 것이다. 

희생자는 멧비둘기, 가해자는 알 수 없다. 

담비?

골짜기 오른짝 줄기가 정맥 길, 오늘 산길 낮지만 제법 굴곡이 있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잔뜩 찌푸렸다. 

어떤 산객 옷 벗어 걸쳐두고 길을 떠났다. 
나만치나 정신 없는 양반이 또 있구나 싶다. 
상표와 크기 등을 두루 살핀 끝에 배낭 옆구리에 차고 왔다. 

사적골재, 정읍 산내와 칠보를 가른다. 

좀처럼 조망이 터지지 않는다. 

쩌 산 너머 정읍, 태인 들녘.

사자산, 그 이름 장하나 아무런 특징이 없다. 
지형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주민들이 그리 부른다 한다. 
산 밖에서 봐야 이름값을 헤아릴 수 있을까?

참나무 숲 사이로 제법 뾰족한 노적봉이 보인다. 

굴거리나무가 여러 주 흩어져 자생하고 있다. 
내장산 굴거리나무가 자생하는 북방한계 군락지라 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데 여기는 좀 더 북쪽이다. 
온난화의 흐름을 타고 북상하고 있는 걸까? 

순창군 호남정맥 시작점이라 표시돼 있다. 여기부터 산길 왼쪽은 쌍치면이 되겠다. 
산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지나는 능선, 봉우리마다 즐비한 전호의 흔적을 본다. 
눈으로 보면 분명한데 사진으로 박아놓으면 영 태가 나질 않는다. 
쌍치는 오랫동안 해방구였다. 
해방구를 보위하기 위한 빨치산들의 전호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노적봉으로 향하는 날등 깎아지른 능선 위 참나무, 멧돼지가 진흙을 발라놨다. 
이런 비빔목이 날카로운 능선을 따라 서너 그루 줄지어 있다. 

정읍 북면 방면
노적봉

바람 휘몰아친다. 
정신이  오락가락할 지경, 바람 끝이 제법 날카롭다. 
언뜻언뜻 눈발 날렸지만 끝내 눈은 오지 않았다. 

저짝이 고당산, 저 산을 넘어야 오늘 산행이 끝난다. 

굴재

정맥 좌우에서 비닐하우스와 우사가 치고 올라와 어수선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사람 사는 마을에 불이 켜진다. 
정맥 좌우 칠보와 쌍치의 불빛이 한눈에 잡힌다. 
오늘의 산길이 제공한 최고의 조망이다. 
구절재에서 개운치에 이르는 전 구간에서 단 한차례도 시원한 조망을 제공하지 않았다. 
산은 나에게 "조망 따윈 사치야"라고 으름짱을 놓았다. 

고당산 642.4m

좁게 열린 하늘 틈새로 석양 여명이 사그라진다.

개밥바라기
정읍시내 불바다

노란 리본이 길을 안내한다. 
어두운 산길에서는 자칫 길을 놓치기 쉽다.  

철망과 대숲이 나타나고 잠시 뒤 산닭을 키우는 농가 뒤곁에 내려섰다. 

개운치

잠시 당황했으나 마당을 지나니 바로 고개를 넘는 찻길이다.  
정읍과 쌍치를 잇는 개운치, 고갯마루는 정읍 쪽으로 더 올라가야 하는데 정맥은 고갯마루 아래쪽으로 이어진다. 
어찌하여 고개 넘어 쌍치 쪽에 정읍에 속하는 마을이 있는 것인지 늘 이상했는데 이제 해명이 된다. 
도로가 그리 나 있을 뿐 실제 분수령이 되는 고갯마루는 여기가 맞다. 
예상 시간보다 한 시간 가량이 지체되었다. 
마중 나온 고창 농민을 만나 다시 구절재로 넘어간다. 

호남정맥_구절재-개운치.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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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걷기로 작정한 오늘, 내심 평균 시속 2.5km를 목표로 했다. 
하여 휴식 시간을 포함하더라도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는 목적지에 당도하리라 생각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할랑할랑 걸어 다닌 지난번 산행과 비교하면 같은 시간 동안 십리 가량을 더 걷기는 했지만 그만큼 피로도가 높다. 
이제 속도를 염두에 두고 산을 탈 나이는 지난 모양이다. 
그래도 아침 일찍 서둘렀다면 내장 갈재(추령)까지는 무난히 가 닿았겠다. 
할랑할랑 산을 타되 좀 부지런히 서둘러 산행 시간을 늘리는 것이 상책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