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공항에 내린 나는 행여 해 넘어갈세라 서둘러 높은오름으로 달렸다. 
해가 어디로 어찌 떨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곳이라야 지는 해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땀 식힐 겨를 없이 해가 넘어간다. 
해는 한라산 오른짝 이름을 알 수 없는 오름들 너머로 고요히 사라졌다. 
해 넘어간 자리 봉화가 피어올랐다. 
뭇 오름들을 거느리고 묵묵히 버티고 선 한라산을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오름마다 봉화가 올랐다는 그날의 투쟁, 그날의 투사들을 생각한다. 

가시리,
한라산 두어 병씩 나눠 마시고 혼곤한 잠으로 빠져들었다. 
뭔가 많은 꿈을 꿨으나 눈을 뜨면서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개와 주인의 배웅 속에 길을 나선다. 
나는 오늘 산으로 간다. 

녹산로
산록도로

1100 고지 탐라각 휴게소 산악인 고상돈 묘소 부근에서 산으로 들어간다. 
삼형제오름 - 노로오름 - 붉은오름 - 살핀오름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 한다. 
한라산 깊은 곳 광활하게 펼쳐진 밀림 지대인 이곳은 무장대의 주요 활동 근거지이자 애월, 한림 일대 주민들의 피난처였다.  

조릿대 우거진 거친 산길이지만 시작만 잘하면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다. 
오름과 오름 사이 많은 계곡을 만난다. 
물이 없는 건천이 대부분이지만 물 맛은 매우 차고 달다. 
물통의 물을 죄다 비우고 새로 채워 넣는다. 

세잎복수초

숲 바닥은 온통 복수초 천지, 

복수에 빛나는 총탄으로 이제 고인 눈물을 닦아다오~
마침내 올려질 승리의 깃발 힘차게 펄럭여다오~

전혀 다른 의미지만 이 노래가 자동으로 따라 나온다.
하여 나는 복수초라 부르는 걸 좋아한다. 
조릿대로 일색화 되어가는 숲 바닥의 식생에서 이들의 운명이 위태로워 보였다. 

첫째(큰오름)
둘째(샛오름)

삼형제오름 마지막 봉우리(말젯오름)에 섰지만 아직 이 오름의 전모를 알 수 없다. 
노로오름 지나 붉은오름에 이르러서야 "오~ 삼형제오름이란 말이지"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다.
오름 하나하나가 확연히 구분되는 중산간지대의 오름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길은 잘 보이다 사라지기도 하고 그럭저럭 방향 잡아가며 걷다 보면 다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오름과 오름 사이에서 간혹 길을 잃게 되나 전화기 속 지도에서 위치를 가늠해가며 걷다 보면 길은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  

오소리똥굴
오소리똥

제주 사람들은 오소리를 '지다리'라 부른다네.  지달(땅에 사는 수달)이 지다리가 되었다고..
똥만 말고 실제로 한 번 봤으면 좋겠네. 안 잡아먹을 테니 함 보자. 

무심코 답한다. 
노로오름 감수다.

노로오름 정상, 한라산 정상부를 바라보며 밥을 먹는다. 
이스렁오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철쭉 흐드러지던 이스렁오름, 철쭉 필 때 다시 가고 싶네.  
갈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송악산, 가파도도 보이고..

노로오름에는 여러 갈레 길이 어지러이 교차한다.  
족은노로오름 거쳐 붉은오름으로 갈 생각으로 길을 잡아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돌무덤은 두렵지 않으나 잡목 우거진 가시밭길을 도저히 헤쳐갈 재간이 없다.  
간신히 빠져나왔다. 

노로오름에서 내려와 잠시 한라산 둘레길을 따라 걷는다. 

잣담

고색창연하게 변모한 옛사람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숨은물뱅듸 방면으로 스며든다. 
한참을 그렇게 가도 숨은물뱅듸는 나오지 않고 붉은오름은 멀어지고..
숨은물뱅듸를 포기하고 사선으로 붉은오름 방면으로 길을 잡아 나아간다. 
같은 듯 다른 듯, 숲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썩은물통
너덜지대
잣담의 흔적

물맛 좋고..

 

숲속을 헤집다 보니 곳곳에서 노루가 튄다. 
이 녀석들은 일단 튀고 본다. 상당한 거리를 확보한 연후에 화가 나 못견디겠다는 듯이 컹컹대며 사납게 짖어댄다.
고라니, 노루 다 그렇지만 한라산 노루 짖는 소리는 유독 사나워 지척에서 처음 듣게 되면 간이 소스라치고 심장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허나 자주 듣게 되니 나중에는 그저 그런갑다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눈앞에 붉은오름이 나타났다. 
한바탕 땀을 쏟아 붉은오름 정상에 선다. 
붉은오름 정상부는 숲으로 덮여 있지만 두어 군데 조망이 터진다. 
붉은오름은 '삼별초 최후 항전의 엣터', 지금으로부터 750여년 전 여몽연합군과의 격전에서 항파두리 토성이 떨어지자 부하 70여 명을 거느리고 성을 탈출한 김통정은 들 넘고 산을 돌아 붉은오름에 와서 포진, 소수 병력으로 최후 결전을 꾀하였으나 끝내 패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아내와 함께 자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써 42년 간에 걸친 삼별초의 항몽투쟁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오름나그네, 김종철 저)
당시 흘린 피가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하여 붉은오름이다.   

드디어 삼형제오름을 온전히 본다. 
중계탑이 서 있는 맏이, 둘째 그리고 막내, 가장 오른쪽 펑퍼짐한 노로오름까지..

삼형제오름(큰오름, 샛오름, 말젯오름)
노로오름과 족은노로오름

남북으로 두 봉우리가 이어져 각각 큰노로, 족은노로라 불리며 북동쪽에도 알오름 같은 낮은 봉우리가 딸려 있어 대.중.소 세 봉우리가 느슨한 기복을 이루며 연결돼 있다. (오름나그네, 김종철 저)

노로오름 너머 바리메오름과 노꼬메오름, 바다 위 비양도가 보이고..

한라산 정상부, 쳇망오름과 사제비동산이 눈앞에 있다. 

어승생악, 족은두레왓
굴뚝새

 

붉은오름에서 내려와 집 짓고 있는 굴뚝새를 만났다. 
낮은 곳에 내려와 겨울을 난 녀석들은 고지대로 이동하여 번식한다. 
덕분에 한참을 쉬었다. 
월동지에서는 들릴 듯 말 듯 찍, 찍 하고 우는 녀석이 산이 떠내려가라 노래한다. 

붉은오름에서 살핀오름 방면으로는 길이 따로 없어 붉은 노끈 표지기를 따라가 보았다. 
밑져야 본전이다. 
살핀오름은 항몽 삼별초군이 적정을 살피던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표지기는 살핀오름 아래에서 사라지고 나는 오를까 말까 눈치를 살피다가 그냥 지나쳐왔다.
오르는 길이 너무 험악해 보였던 것이다. 
1100 도로 휴게소를 목표로 나아간다. 제법 굵직한 길이 나타나고 그 길을 따르니 1100 도로가 나타난다. 

휴게소 500여 미터 전방에서 도로로 올라섰다. 
여덟 시간가량을 산속에 있었다. 
때가 되면 숨은물뱅듸와 족은노로오름, 산물내를 잇는 길을 잡아 다시 오겠다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