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전북도연맹 간부수련회 참가자들은 산란이(궤펜이)오름 일대를 답사했다.
조천읍과 남원읍의 경계에 걸쳐 있는 속칭 '산란이'는 남쪽에는 (큰)궤펜이오름이 있고 그 뒤쪽(샛궤펜이, 섯궤펜이오름)이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적인 요새를 이룬 곳으로 4.3 당시 군경 토벌대와 유격대가 맞붙은 전투 현장 가운데 하나다.

초겨을 이른 눈이 쌓였던 1949년 11월경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진 산란이오름 전투는 해병대, 경찰 1개 조와 김의봉(제주도 인민유격대 3대 사령관)을 필두로 한 유격대가 맞붙었다. 양쪽 모두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제주 백 년은 “하룻밤의 격전이 끝난 후 공비 6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도 많은 전사자를 내는 희생이 따랐다”라고 설명한다.
-제주의 소리(전투·고난의 산란이오름, 제주 4.3 그날의 기억 되살리다)

전투 현장을 답사하는 것은 학살과 피학살, 희생을 넘어 항쟁으로서의 4.3을 복원하고 되돌아보고자 함이다.

2022년 7월 6일

표고막이 있는 태역(잔디)밭 나무 그늘 아래서 산란이오름 일대의 지형과 그날의 전투 정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당시 이곳 태역밭은 무장대가 토벌대를 유인 공격한 곳이다.
선발 소부대를 공격하던 무장대는 뒤따라 올라온 본대의 공격에 직면했다.
본대는 태역밭을 우회하여 산란이오름 능선에 중화기를 걸고 무장대를 공격했다.
이 전투로 피아간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산란이 태역밭 허영헌 눈밭이 피로 벌겋게 되었다".

오름을 향해 숲으로 들어서고 있다.

샛궤펜이오름 능선, 토벌대가 이곳에 중화기를 걸고 무장대의 배후를 공격했다.

궤펜이오름 방향으로 내려서고 있다.

마른 개울을 건너..

 

(큰)궤펜이오름 안부 피난민과 무장대가 머물렀던 은거지에 당도했다.
그중 가장 뚜렷이 흔적이 남아 있는 곳, 낮은 돌담이 둘러쳐져 있고 내부에는 불을 피웠던 화덕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금속탐지기로 발굴, 비장해두었던 출토품을 꺼내 들고 출토 당시의 상황과 70여 년 전 산란이오름 일대에 머물렀을 피난민과 무장대의 생활 형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몽당 숟가락과 탄피, 온전한 숟가락이 함께 출토되었다.
두 종류의 숟가락은 무장대와 피난민이 함께 혹은 교차하여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탄피는 은거지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이곳에서도 교전이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다.

간단한 제물을 올리고 절을 드린다.

추모곡 '독립군 추도가'와 '제주도 빨치산의 노래'를 바친다.

(큰)궤펜이오름 북동사면에 위치한 궤, 궤펜이오름이라는 이름은 이 궤로부터 비롯되었다.
커다란 궤가 패여 있는 오름이라는..

고씨 가족은 성판악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궤펜이오름(해발 792m) 부근까지 피신했다. 토벌대는 산속에 숨을 만한 곳을 없애려고 마구잡이로 불을 놓았다. 추위가 풀려 눈이 녹을 무렵, 산 위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다. 조천면 교래리에 주둔했던 2연대의 2개 중대 병력이 성판악부터 아래쪽으로 ‘토끼몰이’하듯 토벌작전을 벌인 것이다. 불에 탄 산속에서 숨을 곳을 찾지 못한 숙부와 사촌 누나(당시 13), 어머니와 둘째 누나, 누이동생이 토벌대에 붙잡혔다. 이들은 교래리로 갔다가 제주시 주정공장에 수용됐다. 고씨와 사촌 형(당시 17)은 군인들이 닥치자 반대 방향으로 빠져나간 뒤 산에서 만난 주민들과 피신생활을 이어갔다. 신발은 얼기설기 엮은 짚신이 고작이었다. 동상에 걸린 주민들 발에서 고름이 흘렀다.
- 총살·도피·귀순…고기정씨 가족 4·3 수난사

우리는 숲에서 다시 빠져나왔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숲은 당시의 흔적을 빠르게 지워가고 있다.
허나 어찌 잊힐리야 그날의 고난과 피어린 항쟁의 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