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잘 붙여놓고
다치지 말라고
부처님의 가호로

일체의 악을 범하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렇게 살고도 다치면
그게 이상한 것이겠다.

묻노니 그대
그리 살 수 있겄는가?

금산사 미륵불, 2022, 박홍규, 목판

이 미륵불상에 대해서 『증산도 도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밤에 금산사 미륵전에서 불공을 드리던 사람들이 실수하여 장륙미륵불상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좌우 시립한 보살상과 미륵전은 화마를 피하였으나 가운데에 서 있는 미륵불만 불에 타서 왼쪽으로 넘어졌다.
장공 김복진(金復鎭)이 조각을 시작한 지 2년 9개월 만에 완성하여 무인년(1938년) 9월 3일에 육장 반(六丈半)의 미륵불을 모셨다는 것이다. 이 소조불상은 작가 스스로 ‘서울에서 만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서울에서 만들어서 기차로 운송하여 현지에서 조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금산사미륵전본존상(金山寺彌勒殿本尊像))]

김복진(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전후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복진(金復鎭))]


우리나라 최초의 양풍 조각가(洋風彫刻家).
1925년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참여에 이어 엠엘당(ML黨)에 가담했다가, 1928년의 3차 공산당 검거 때에 붙잡혀 6년간의 감옥살이로 한때 중단되었다.

옥중에서는 불교에 마음을 두면서 목각 불상(木刻佛像)을 만들어 형무소 직매장에서 팔게 되었다. 1933년 말 출옥하여, 1935년에는 생활을 위해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 학예부장으로 미술 비평을 쓰기도 하면서 작품 제작에 열중하였다.

1936년부터 불의의 발병으로 사망하는 1940년까지 조선미술전에 출품한 「목」·「불상습작」·「나부(裸婦)」(특선)·「위이암(韋利巖)선생상」·「백화(白花)」·「소년」(특선)·「다산선생상(多山先生像)」 등이 그 시기의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은 그 뒤 동생 김기진이 보관하였으나 6·25 전쟁 중 모두 불타 없어졌다.
마지막 5년간의 본격적 제작기에는 사회적 기념 동상의 위촉도 많이 받았고, 1935년 김천중학교(金泉中學校)의 「최송설당 여사상(崔松雪堂女史像)」 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상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36년에 만든 금산사(金山寺) 요청의 「미륵대불」과 1939년에 정읍 김수곤(金水坤)의 시주 3만 원으로 착수하였던 법주사(法住寺)의 「미륵대불」이 있다. 그러나 「법주사 미륵대불」은 광복 이후 윤효중(尹孝重)·장기은(張基殷)·임천(林泉) 등의 손을 거쳐 1963년에 변질된 형태로 완성되었었고, 현재는 청동대불로 변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복진(金復鎭))]

윗글에 따르면 금산사 미륵불은 조각가 김복진이 남긴 현존하는 유일한 조각상이다.
강증산은 "나를 보려거든 금산사 미륵을 보라" 했다. 그러니 입적한 강증산이 카프 조각가 김복진의 손을 통해 불 타 없어진 미륵을 대신해 새로운 미륵으로 현신한 것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