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시화전이 열리던 날 시화전과 관련된 문화예술인들과 농민단체장들 그리고 불청객 하나가 함께 하는 술자리 한귀퉁이에 내가 앉아 있었다.
나는 당시 홍규형 그림을 싣고 올라간 운반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이중기 시인이 농정신문에 기고하였다.
'돌장승처럼 앉아있기만 하던 한 친구'는 나이고 '설을 풀어내고 있던 사내'는 내가 보기에 그 자리의 불청객이었다.  

아래는 이중기 시인의 글 전문이다.


전농 깃발에 대한 생각
2008년 11월 17일 (월) 07:46:23 이중기 webmaster@ikpnews.net

경기도 수원. 농촌진흥청 잔디마당 천막 술자리. 그리고 11월 11일. 그날은 소위 농민의 날이었고 전농은 그날 지정된 천막자리에서 농산물을 판매하는 여느 단체와는 달리 판화와 그림, 시화(詩畵) 몇 점을 전시하던 날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볼일을 보다 오후 좀 늦게 거기에 도착해서 곧장 술자리로 붙잡혀 갔다. 대부분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로 붐비는 자리에 데면데면하게 앉아 소주잔을 홀짝거리느라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갑자기 활기를 불어넣는 말이 나온 것은 초겨울 햇살이 서쪽으로 제법 기울어질 무렵이었다.

“전농 깃발에 벼 이삭이 있는데 알곡 개수가 몇 갠지 알어?” 어떤 사람이 불쑥 그렇게 물어 술자리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내 왼쪽에 앉은 사내가 심드렁하게 그 말을 받았다.

“아 쓰펄, 내가 벼 이삭을 그려 줄 때는 알곡 개수가 스물네 알 이었는데 엄청 떨어지고 열여섯 개만 남았다 하네.”

“그래? 그렇게나 많이 떨어졌어?”

“세월이 흘렀잖아, 많이 떨어질 만도 하지.”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바짝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던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갑자기 중단되고 전농 깃발 이야기로 옮겨진 것은 내 옆자리 한 귀퉁이에서 돌장승처럼 앉아 있기만 하던 한 친구가 좌중을 휘어잡아 설을 풀어내고 있는 한 사내를 지목하여 누구냐고 물었을 때였다.

농사꾼이면서 그림을 그리는 박홍규 화백이 이 사내의 정체에 대해 말했는데 간추리자면 이렇다. 지금까지 말이 많은 이 사내는 농사꾼도 아니면서 어느 농민단체의 장이고 전농에 관심이 있어 연구를 좀 했는데 전농 마크의 나락이 몇 개인가까지 세어본 사람이란다. 그렇게 해서 전농 깃발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나는 전농 마크 안의 나락이 몇 개인지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또한 헤아려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것에까지 관심을 가졌다니 자못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전농 마크 도안을 내 옆자리에 앉은 ‘환쟁이’(화가) 박홍규가 그렸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그린 사람은 스물넷이라는데 내가 헤아려보니 분명하게 열여섯 개이더라구.

“그게 확실해요? 왜 그렇게 많이 떨어졌지?” 사내는 확신에 차 있었고 몇 안 되는 전농 회원들은 단장 깃발을 확인 해볼 수 없는 입장이라 애매한 표정들만 짓고 있었다.

“그런데 나락 알이 왜 스물네 개였어? 그 숫자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 같은데?” 이 질문은 서림이 수염을 달고 판화를 하는 류연복 화백이었지 싶은데 기억은 흐릿하다.

“아마도 남북한 광역시도를 합한 숫자일 겝니다.” 옆에 앉은 박홍규 화백은 표정에도 말에도 자신이 없어 보인다.

“그건 아닐 것 같은데. 그 당시 남한의 광역단위가 고작 열서넛 밖에 안 되었고 북한까지 다 해도 턱없이 모자라는 거 아냐?”

누군가가 손가락을 짚어가며 광역단위를 헤아려보았지만 스물넷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에 대해 알 리가 없는 농사꾼들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박홍규 화백 얼굴로 몰려갔다.  “아 그건 나도 몰러, 그게 어느 세월 일인데…….”

막걸리에 불콰해진 이 ‘환쟁이’는 능글맞게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그걸로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이 이야기는 ‘물건’이 하나 되겠구나 싶어 주머니를 뒤져 종이쪽에다 ‘전농 깃발’이라고 메모를 해두었다.

그후 며칠이 지나 영천에 돌아오자 말자 나는 농민회 사무실로 가서 전농 깃발 속의 나락 알곡 숫자를 헤아려보니 스물다섯 개였다. 혹시나 싶어 자료집을 뒤져보니 의외에도 ‘전국농민회총연맹 기에 대한 규정’이 실려 있었다.

나락 알곡의 숫자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다만 그 숫자는 ‘남북한 도의 총 수와 같다’고 하면서 ‘전농의 통일의지와 전국적 대표성을 의미’한다고 적혀 있다. 무언가 좀 이상하다. 1995년 제정 당시 이후 변화된 행정구역과 전농의 규정이 아무래도 엇박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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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 자료실에서 가져온 파일. 나락알은 18개, 남북에 걸쳐 있는 강원도를 두번 헤아리 그린것이라면 18개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