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여름 마지막 농활을 수행한 이후 농활대를 받는 입장이 되어 지난 20여년간 많은 농활대와 함께 일을 해왔지만 내가 직접 농활대원이 되어보지는 못했다.  

2013년 6월 20일 민중농활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농활대의 대원이 되어 농활을 수행하였다. 

민중농활, 단 하루 짧은 일정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밀려오고 오늘날 어려움에 처한 농활의 의미를 되새긴다. 

6월 24일 오늘은 한대련 농활이 시작되는 날, 그사이 큰놈이 커서 첫 농활을 간다. 

나의 첫 농활은 어떠했는가?


1985년, 처음으로 농활을 갔다. 

1985년은 전두환 정권의 학원자율화 조치(1983년 12월)로 1년 정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총학생회가 새롭게 건설되어 활동을 시작한 첫 해다. 

1985년은 또한 농촌 봉사활동 등으로 불리던 농활을 '농촌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하고 대규모로 참가자들을 조직하여 대중적이고 전투적인 농활을 개시한 해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1학년, 농어촌연구부라는 동아리에서 여름농활을 준비하면서 약 일주일간을 학교에서 공동숙식하다시피 했다. 

학습할 것도 많고 준비할 것도 많았다. 

농활을 하루 앞두고 첫 농활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안고 학생회관에서 농활대원 전체가 다 같이 잠이 들었다. 


아직 동트지 않은 이른새벽 머리를 툭툭 차는 군화발에 잠이 깼다. 

전투경찰을 동반한 사복형사들이 학내에 진입하였다. 

그때가 6월 29일이었다. 이른바 6.29 학원침탈..

수배중인 총학생회 간부를 연행하겠다는 명분으로 학원 자율화 조치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 경찰병력이 학내에 침투한 것이다. 

명분은 그러했으나 실상은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농활 열기에 놀란 전두환 정권이 그 기세를 꺾어보고자 행한 짓거리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신문지에는 좌경용공 학생들이 농민들을 의식화시키기 위해 대규모 농활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가 연일 대서특필되고 있었다. 


시간이 지연되기는 했으나 우리는 예정대로 학교에서 내준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세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전리, 산간 벽지의 깡촌이었다. 

마을 옆 고개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폭설 내리는 날 아버지와 함께 얼어죽은 아이의 추모비가 서 있었다. 

속소는 마을회관, 시멘트 바닥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차일 지붕을 깔고 잠을 잤다.

 

짐을 푼 농활대원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다. 

해질 무렵, 마을 어르신들은 마당 쓸다가도, 부엌에서 저녁 장만하시다가도 우리만 마당에 들어서면 방 안으로 줄행랑을 치셨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일체의 응대를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면사무소, 지서에서 얼마나 주민들에게 겁을 줘 놨던지 우리랑 마주치기만 해도 빨간물이 들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우리는 마을회관에 짐을 풀고 농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동네 어귀 다리 밑에 짐을 푼 농활대도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는 마을회관에 비치된 빗자루, 삽 등 연장을 챙겨들고 대대적인 마을청소에 나섰다.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이 잠시 들여다볼 뿐 마을 주민들은 여전히 만나기가 어려웠다. 

첫날은 마을청소에 거의 하루를 바쳤던 듯 하다. 

저녁 평가시간, 농활대장 좌우에 이장, 새마을지도자, 방위 아자씨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각자 커다란 수첩을 하나씩 펼쳐놓고 우리 얘기를 열심히 받아 적는다. 

당시 전두환이 동생 전경환이를 등에 업은 새마을 지도자의 위세가 심히 뻣뻣하였다. 

즉석에서 작전을 모의하였다. 

농활대원 하나 심하게 졸고 분노한 농활대장이 집합을 명령한다. 

우리는 기강확립을 명분으로 야간구보로 마을을 벗어나 어두운 밤길에서 모기에 뜯겨가며 평가의 긴요한 부분을 해결하고 마을회관으로 돌아왔다.


세번째 날이 밝았다. 

이른 아침 우리는 마을어귀 등 요소요소에 잠복해 있다 경운기가 오면 무작정 올라타고 내리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일하러 가시는 농민들을 기어코 따라 나셨다. 

비로소 농민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내가 한 첫 작업은 아마 고추밭 줄 치는 일이었을 것이다. 

농활대원들을 직접 대면하고 함께 일을 해본 마을 주민들의 태도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일감이 쇄도하고 아동반부터 부녀반에 이르기까지 분반활동이 활기있게 돌아갔다. 

농민들이 속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로 말하면 전두환이는 복합영농이 농민들 살 길이라고 축산 장려하고 동생 전경환이는 병든 소 수입해서 떼돈 벌고 그 결과로 소값은 왕창 폭락하던 시절이다. 

전국 곳곳에서 소몰이 시위가 전개되고 농촌 사회는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과 울분이 짓누르고 있었다.   

논두렁, 밭두렁에서 풀을 죄다 쥐어뜯어가며, 땅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쳐가며 울분을 토하던 농민들과의 대화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잘해주던 노총각 형님은 그해 겨울농활을 갔을 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농약을 마시고 한 많은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렇듯 곡절 많았던 농활이 끝나는 날 마을잔치에 마을 주민 전체가 한 분도 빠짐없이 나와주셨다. 

그야말로 북 치고 장구치고 밤새도록 한덩어리가 되어 춤추고 놀았다.  

우리가 마을을 떠나던 날은 몹시도 비가 내렸다. 

마을 어르신들은 우산도 받지 않고 빗 속에서 눈물바람하며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가슴 뜨거웠던 그날의 이별이 생생하여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 후로 나는 몇년간 보은군 구석구석 여러 마을로 농활을 다녔다. 

이후에 보은군에 농민회가 만들어지는 건설 과정에서 우리가 농활을 다녔던 마을에서 많은 분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며 농활대가 흘린 땀이 헛되지 않았다는 기분 좋은 평가를 들었다. 


긴 세월이 흘렀다. 

이후 농활은 90년대 초, 중반의 전성기를 지나 지금은 많은 어려움 속에 진행되고 있다. 

농민들의 형편도, 학생들의 사정도 전과 같지 않다. 

농활의 존폐 여부가 논의되기도 한다. 

하지만 농활 혁신을 꾀하며 오늘도 머리를 싸매는 사람들과 여전히 농촌현장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한 농활의 새로운 활로는 반드시 열리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