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피노리 가는 길
피노리 가는 길
2022.12.2112월 5일(음력 11월 9일)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 우금티 전투가 개시되었다. 나는 장성 갈재 아래 입암에 서 있다. 잠행에 나선 전봉준 장군이 스며들었던 입암산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 없다. 그이의 발자취를 거꾸로 밟아 올라간다. 곧게 뻗은 국도를 달린다. 태인, 원평, 전주 스쳐 삼례, 여산, 논산, 노성 지나 이인.. 북진하는 농민군이 지났던 고을들이 휘리릭 지나간다. 곰티재로 향한다. 11월 22일 1차 공주전투, 농민군은 우금티에 앞서 곰티재를 넘어 공주를 공략하고자 했다. 농민군 복장의 전봉준 장군은 붉은 덮개가 휘날리는 커다란 가마 위에서 열정적으로 전투를 독려했다. 곰티재 너머 공주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예사롭지 않은 산세, 농민군이 치고 올랐을 남쪽 사면은 몹시 가팔라 얼마..
동학농민혁명 완산 전투
동학농민혁명 완산 전투
2022.12.175월 30일(음력 4월 26일) 농민군은 용머리고개 아래 전주 삼천까지 진격하여 하룻밤을 머물렀다. 이튿날, 농민군들을 장꾼들과 함께 무혈입성했다. 이때는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전주 서문 밖 장날이라. 무장, 영광 등지로부터 사잇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오던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미리 약속이 정하여 있던 이날에 수천 명의 사람들은 이미 다 시장 속에 들어왔었다. 때가 오시(오전 11시 - 오후 1시)쯤 되자 장터 건너편 용머리 고개에서 일성의 대포소리가 터져 나오며 수천 방의 총소리가 일시에 시장판을 뒤엎었다. 별안간 난포 소리에 놀란 장꾼들은 정신을 잃어버리고 뒤죽박죽이 되어 헤어져 달아났다. 서문으로 남문으로 물밀듯이 들어가는 바람에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같이 섞여 문안으로 들어서며 한..
완산칠봉,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완산칠봉, 동학농민혁명 녹두관
2022.12.07완산칠봉은 장군봉을 중심으로 내칠봉, 외칠봉을 합하여 봉우리가 도합 열세 개. 고만고만 오밀조밀한 봉우리 가운데 장군봉(해발 186m)이 최고봉이다. 완산칠봉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용머리고개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용과 관련된 전설이 깃든 용머리고개는 전주에 입성한 농민군, 농민군을 뒤쫓아온 관군 모두가 넘어야 했던 전주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쇠락한 고개, 고개 좌우에 폐건물, 문 닫은 가게들이 즐비하다. 농민군이 용머리고개를 넘어 전주성으로 들이치던 당시의 상황을 오지영의 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때는 4월 27일(양력 5월 31일) 전주 서문 밖 장날이라. 무장, 영광 등지로부터 사잇길로 사방으로 흩어져 오던 동학군들은 장꾼들과 함께 섞여 미리 약속이 정하여 있던 이날에 수천 명..
최 보따리, 해월 최시형
최 보따리, 해월 최시형
2022.11.17해월 최시형, 그는 평생을 바쳐 동학 포교에 전념했다. 교조 최제우 순교 이후 그의 활동은 거의 대부분 지하에서 이뤄졌다. 그의 기나긴 잠행과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동학은 조선 민중의 가슴 속 깊이 뿌리내린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동학은 그 자체 교리가 품고 있는 민중성과 혁명성으로 하여 조선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관의 늑탈과 탄압 속에서 구축된 견고한 조직망은 사회변혁을 꿈꾸는 혁명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최시형ㆍ이필제 영해봉기를 성공시키다. 이필제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가 낳은 직업적 봉기꾼, 혁명가였다. 그는 결코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봉기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성장하고 민중봉기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냈다. 그는 일단 한 고을에 잠입..
나락 익기만 기다렸다.
나락 익기만 기다렸다.
2022.10.19갑오년 9월(음력) 마침내 농민군이 다시 일어섰다. 전봉준은 각지의 관아에 재기병을 알리는 통문(양력 10월 8일)을 보내 농민군 재기병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군을 쳐 물리치고 그 거류민을 국외로 구축할 마음으로 다시 기병하자"는 취지의 격문을 받아 든 각처의 농민군은 군현의 무기고를 헐어 무장을 갖추고 삼례와 남원을 거점으로 한 전봉준, 김개남 휘하로 모여들었다. 한편 최시형 교주는 청산에 각 포 접주들을 불러 모아 전봉준과 협조하도록 당부(양력 10월 16일)하고, 궐기하라는 통문을 내렸다. 이로써 동학 농민군의 9월 재봉기는 호남을 넘어 전 조선이 궐기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11월 9일(양력) 삼례를 출발한 호남 농민군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이 논산에서 합류하기까지 한 달..
바람 앞에 서다.
바람 앞에 서다.
2022.10.04청일전쟁 발발 후 조선 민중의 반일 항쟁은 마른풀에 불이 붓 듯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공주와 이인, 보은에서 무장한 농민군이 출현하고 공주 부근에 집결한 농민군 만여 명이 충청 감영군과 대치하였다. 천안에서는 농민들이 일본인을 처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영남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북상하는 일본군 병참부에 대한 습격과 서울 부산을 연결하는 통신선을 절단하는 일이 거의 매일같이 전개되고 있었다. 상주, 안동, 김천, 예천 등지에서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밖에 영동 지역에서도 농민군들이 출현했고, 호서와 가까운 근기 지역(죽산, 안성 등)에서도 한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멀리 해서 지역과 청일 간 전투가 벌어진 평양 인근에서도 항일 투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이처럼 일..
관민상화, 도인과 정부는 묵은 감정을 버리고 협력할 것
관민상화, 도인과 정부는 묵은 감정을 버리고 협력할 것
2022.08.22전주화약이 성립된 6월로부터 재봉기하게 되는 10월에 이르기까지 농민군의 활동은 집강소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이 시기 전봉준은 전라도 모든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함은 물론 이를 합법적이고 체계화된 통치체계로 세우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쏟아부었다. 전봉준은 각 고을을 직접 순회하며 이를 추동하는 한편 관찰사 김학진을 집요하게 압박하고 재촉하여 집강소를 공인된 통치 기관으로 만들어나갔다. 전봉준은 김학진과 협조하여 합법적인 방식으로 폐정을 개혁하면서 전라도 전역을 손안에 거머쥐고자 했던 것이다. 8월 초 관찰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도인을 인솔하여 전주를 지킴으로써 국난을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김학진이 말하는 국난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탈(7월 23일)과 전쟁 도발을 의미한다. 그간 전봉준과 주도권 확보를 놓..
집강소, 조선의 새 하늘을 열다.
집강소, 조선의 새 하늘을 열다.
2022.07.18폐정개혁 12개 조 △도인과 정부는 묵은 감정을 버리고 서정에 협력할 것 △탐관오리의 죄목을 조사하여 하나하나 엄징할 것 △횡포한 부호들을 엄징할 것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징벌할 것 △노비문서는 불태울 것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평양립을 벗길 것 △청춘 과부의 개가를 허용할 것 △무명잡세를 폐지할 것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위주로 관리를 채용할 것 △외적과 내통한 자는 엄징할 것 △공사채를 막론하고 지나간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전주성에서 물러났으되 무장을 풀지 않은 농민군이 주체가 되어 폐정을 개혁하는 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집강소의 폐정개혁 12개 조항은 백성들에게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
내 청춘의 비망록
내 청춘의 비망록
2022.06.21바람 부는 보리밭, 내 인생에 이런 출렁거림이 언제 있었던가 그해 6월,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휴전이 성립됐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지 열흘 만이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은 격랑에 휩싸였다. 조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는 청일 양군의 조선 출병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곧바로 침략군, 점령군으로서의 본성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자기 나라 백성을 학살케 한 치욕의 역사가 이로부터 비롯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정은 당황했다. 농민군 또한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조정이 받아들인다면 해산하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다. 초토사 홍계훈이 이를 수락함으로서 이른바 ‘전주화약’이 체결됐다.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으며 농민군과 조정의 ..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2022.05.29돌아보면 우리 역사의 어느 한순간 격렬하거나 숭고하지 않은 때가 없다. 격랑의 근현대사에서 5월은 특히 그러하다. 80년 5월 광주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이고도 전투적인 투쟁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세월을 좀 더 거슬러 동학농민혁명의 연대기를 들여다보자. 1만여 농민군이 집결한 백산 대회, 황토현 전투와 황룡강 전투, 전주성 점령에 이르는 승리와 환희의 순간들 모두가 5월 한 달 동안에 있은 일이다. 2018년 정부는 우여곡절 끝에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정했다. 이날은 농민군의 빛나는 첫 승리인 황토현 전승일이다. 당시 조선의 5월은 어땠을까? 6월 말, 하지 전후를 모내기 적기로 삼던 때였다. 1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모내기 시기가 한 달여 앞당겨졌다. 30여 년 전, 19..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2022.04.11고부를 빠져나간 전봉준은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고부로 출병했다. 고부 봉기의 해산과 농민군의 출현은 사실상 동시에 진행됐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조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월 20일(음력)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를 접수하고 백산에 집결하여 격문과 4대 명의를 만방에 띄워 혁명의 성격과 임무, 대상과 주체를 분명히 하고 기율을 엄정히 했다. 그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동학농민혁명군, 그 수가 1만명에 달했다. 당시 농민군의 서슬 퍼런 기상이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로 오늘에 전승되고 있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각처에서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조직된 동학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 삼례집회, 원평취회 등을 통해 훈련되고 조직됐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결기 가득한..
전봉준, 새벽길을 가다.
전봉준, 새벽길을 가다.
2022.03.14새벽길 헤쳐가는 사람들 있어 역사는 전진한다. 여기 새벽길 홀로 걷는 이 있으니 그 이름 전봉준, 녹두장군 되시겠다. 얼마나 많은 필사의 노력 겹겹이 쌓여 그는 혁명의 지도자로 그 이름 역사에 남기게 되었을까?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난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던 고부 농민들과 일평생 혁명을 준비해 온 전봉준의 만남이 고부 농민봉기를 여느 고을의 민란, 농민봉기와 다르게 했다. 죽창을 들건 장두가 되건 피차 목숨을 거는 일,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 없을 터 일개 고을의 난리와 고을을 벗어난 반란은 차원이 달랐다. 생존을 위해 죽창 들고 나선 사람들과 혁명을 위해 봉기의 확산을 꾀한 장두 사이에 곡절인들 어찌 없었겠는가? 그렇게 나선 길, 고부 농민봉기는 두 달간 지속되었다. 민란을 넘어 혁명으로 조병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