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장군
시인 김남주와 전봉준 정신
시인 김남주와 전봉준 정신
2019.10.22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전국의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해남에 내려가 있던 김남주 시인은 그 이튿날 광주로 올라와 친구이자 동지인 이강과 함께 박정희의 폭거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기로 합의했다. 김남주 시인과 이강은 거사를 앞두고 전봉준 유적지(황토현 일대)를 답사하며 결의를 다졌다. - 가을걷이가 끝난 초겨울 들녘 - 황토현과 백산에 올라 창의문을 소리 높여 낭송하고 생가(단소) 방문 - (비문을 손으로 쓸어보고 물끄러미 들과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흰 옷에 갓을 쓴 노인들 목격 - 훗날 이 날의 심경을 형상한 시, (죽창가)를 남겼다. 이들은 이후 지 사건으로 체포, 구속되어 10개월여의 옥고를 치른다..
입암산성~청류암 1박2일
입암산성~청류암 1박2일
2018.12.27녹두장군 일행이 입암산성에 든 날은 1894년 음력 11월 29일, 양력으로 바꾸면 12월 25일이다. 분명 25일로 새겨두고 있었는데.. 하루를 앞당겨 24일 입암산에 들었다. 내 이번에는 장군이 가실 길 이상이 없겠는지 적정을 살피는 척후병 노릇을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함께 하는 길동무들도 있다. 만화제에서 길을 잡아 오른다. 갓바위 조망대에 이르니 이윽고 해가 넘어간다. 시간을 잘 맞촤 올랐다. 사람 사는 동네에 불이 들어오고.. 해 넘어가고 한참만에야 달이 솟았다. 늦장 부리며 올라온 것 말고는 아직 보름달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밤 지나 새벽, 어둠을 찢고 먼동이 트기 시작한다. 시시각각 색이 변한다. 저 멀리 지리산은 거대한 성채.. 해가 솟고.. 온누리에 빛이 번진다. 산성 안길을 지나 청류..
어찌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어찌 나를 죄인이라 이르느냐?
2018.02.22서울로 압송된 전봉준 장군은 대역죄를 다루는 의금부 권설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1895년 4월 24일 새벽 교수형을 받았다. 재판과정에서 일본 영사관 측은 조선민중의 추앙을 받는 전봉준 장군을 조선침략 야욕 실현의 꼭두각시로 삼고자 끊임없이 회유하였다. 이에 대해 장군께서는 “너는 나의 적이요 나는 너의 적이라, 내 너희를 쳐 없애고 나라 일을 바로잡으려 하다가 도리어 너희 손에 잡혔으니 너는 나를 죽이는 것뿐이요 다른 말을 묻지 마라.” 고 단호히 말했으며, 죄인 취급하는 법무아문 관리에게 “도 없는 나라에 도를 세우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 탐관오리를 벌하고, 부당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사람을 매매하여 귀천이 있게 하고 공토로서 사토를 만들어 빈부가 있게 하는 것은 인도적인..
[쿠바 연수 2] 쿠바의 전봉준, 조선의 호세 마르티
[쿠바 연수 2] 쿠바의 전봉준, 조선의 호세 마르티
2017.12.26쿠바로 연수를 가자니 쿠바에 대해 아는 게 너무나 없었다. 오래전 건성으로 읽었던 쿠바 혁명사는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고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쿠바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필요했고, 이 과정에서 '호세 마르티'를 알았다. 쿠바의 독립영웅으로 추앙받는 그는 1895~1898년에 이르는 2차 독립전쟁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지만 전쟁 개시 한 달여 만에 스페인군의 흉탄에 희생(5월 19일)되었다. 때는 1894년 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한 전봉준 장군이 처형(4월 24일)된 시기와 겹친다. 나는 그의 죽음과 생몰연대에 주목했다. 그는 전봉준 장군과 동시대를 살았다. 전봉준 장군보다 2년 빠른 1853년 태어났고 같은 해에 생을 마쳤다. 평생을 혁명에 바쳤고 침략자에 의해..
풍운의 녹두장군
풍운의 녹두장군
2014.04.07풍운의 녹두장군 ⓒ 박홍규 이 억센 가슴 어디에 쓰랴!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녹두장군
녹두장군
2014.03.22時來天地皆同力 때를 만나 세상이 힘을 모았는데 運去英雄不自謀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 백성 사랑하는 길에 허물 없으니 愛國丹心誰有知 나라 위한 우국충정을 알아나 줄지 갑오년 2갑자, 농민군 전주입성 시기에 즈음하여 혁명정신 계승 전시회를 예정해놓고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박홍규 농민화가의 최근작. 비장하게도 녹두장군의 절명시를 새겼다. 새로운 시대를 향한 담담한 당부, 타는 듯한 눈빛이 시공을 가로질러 가슴에 박힌다. 황토현에 부치는 노래 김남주 한 시대의 불행한 아들로 태어나 고독과 공포에 결코 굴하지 않았던 사람 암울한 시대 한가운데 말뚝처럼 횃불처럼 우뚝 서서 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한 몸으로 껴안고 피투성이로 싸웠던 사람 뒤따라오는 세대를 위하여 승리 없는 투쟁 어떤..
녹두장군
녹두장군
2012.10.29국내 유일의 진정한 농민화가 박홍규의 손 끝을 통해 부활하신 녹두장군. 오랫만에 만나 술 한잔 마시러 들어간 홍규형 작업실 한켠 벽에 기대 세워둔 목판 속에 녹두장군 계신다. 고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자네, 각오는 단단히 섰나?" 하고 물으시는 듯.. 고창 사는 후배, 장군님 눈매가 서글퍼보이신다 한다. 마주하는 눈빛마다 다른 말씀을 하시는 모양이다. 그대에게는 뭐라 하시는가?
다시 타오르는 갑오농민의 횃불, 통일농업의 시대로
다시 타오르는 갑오농민의 횃불, 통일농업의 시대로
2010.08.24전북도연맹 민족농업 전진대회 포스터 제작을 위해 창작된 박홍규 화백의 작품. 이런 작품을 뭐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그림 속에서 녹두장군과 농민들이 함께 횃불을 움켜쥐고 있다. 그 횃불은 세상을 온통 밝힐 신성한 빛을 발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타오르는 갑오농민의 횃불, 통일농업의 시대로!"라는 제목을 달아 포스터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정작 포스터에서는 횃불이 사라졌다. 횃불만이 아니라 횃불을 맞잡은 녹두장군과 농민의 손도 사라지고 말았다. 녹두장군과 농민은 서로 격리되어 배치되었다. 다만 구호만이 본래 그림의 의도를 대신 말해주고 있다. 원작에 보다 충실하게 포스터를 구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전봉준 장군의 모습에 작가의 얼굴이 들어있다 하여 한참 들여다보니 대처 그런 것도 같다...
소설 녹두장군
소설 녹두장군
2009.04.01녹두장군 세트 - 전12권 - 송기숙 지음/시대의창 소설 [녹두장군] 지난해 11월 말 지나던 길에 우연히 들른 김개남 장군 묘역에서 느낀 바 있어 녹두장군 한 질을 주문해 받아놓고 읽기 시작했으니 날수로는 거의 세 달이 걸린 셈이다. 물론 집중해서 읽은 시간을 헤아린다면 이보다는 짧은 기간일 것이다. 마지막 12권에서는 애써 속도를 늦춰가며 책을 잡았다 놓기를 여러 차례, 온 산하를 흰 옷과 붉은 피로 물들이며 쓰러져간 갑오 농민군 영령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송구함 때문이었다. 나라를 송두리째 말아먹고 팔아먹고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제 배때기를 불려 온 놈들은 오늘날까지도 세습된 권세를 누리며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반면 외세의 침탈과 지배자의 수탈에 맞서 봉기하였던 농민군의 후예들은 지금도 항..
전두환이 정화한 황토현에 친일작가가 세운 녹두장군이 서 있다.
전두환이 정화한 황토현에 친일작가가 세운 녹두장군이 서 있다.
2009.03.05'갑오농민전쟁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전북도연맹 농업과학원 현장기행을 다녀왔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예보 탓에 인원이 반토막 나고 말았다. 소설 녹두장군의 저자 송기숙 선생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맺어진 '전주화약'의 수수께끼에 대해 모내기철을 코 앞에 둔 농민군들의 발싸심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술회하였다. 몸은 전쟁터에 있으되 마음은 이미 고향의 논밭으로 달려가던 농민군들을 더 이상 전장에 붙들어둘 수 없었던 전봉준 장군 등 농민전쟁 지도부의 고심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하물며 전쟁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 역사기행인 바에야 제끼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도 오신다는데.. 황토현 기념관 주차장에 모인 답사단은 전두환 5공 시절 세운 구 기념관부터 둘러보았다. 해설과 길안내는 정읍..
판화 '녹두장군' - '89 박소래
판화 '녹두장군' - '89 박소래
2009.02.24홍규형의 판화 '녹두장군' 1989년 작품이다. 내가 농사를 짓겠다고 고창에 내려온 1989년 바로 그 해이다. 그새 20년이 지났다. 1991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농민회 재정사업으로 홍규형 판화를 판매하고 남아 책상 서랍속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발견하고 거금 5만원을 들여 표구하였다. 그날로부터 오늘까지 녹두장군은 항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형형한 눈빛으로...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2009.02.11홍규형으로부터 최근 창작한 판화를 선물 받았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 미륵불의 배꼽에서 비결을 꺼내는 동학도들의 이야기를 판화로 형상화하였다. 소나무판에 그림을 새기고 찍어낸 첫 번째 작품을 나에게 주는 거라 했다.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없다. 마애석불을 바라보는 인간군상의 태도와 표정이 다양하다. 그중에는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구성진 해설이 있다. 각자 상상해보시라.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은 거금 삼천 년 전 검단선사의 진상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다 된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임진년 8월 무장 대접주 손화중이 교도들을 동원해 청죽 수백 개와 마른 동아줄 수천 발을 구하여 부계를 만들어 석불의 전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