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 많은 눈이 내렸다. 
헌데 서해안 쪽에 치우친 눈이었던 모양이다. 
일감 취소하고 일찌감치 방장산에 오르려던 생각 접고 전주로 달린다. 
칼잡이 양성 교육을 하기로 한 날이다. 
서해안 쪽에 내린 눈은 보통 태인을 지나면서 사라지게 되는데 이번에는 모악산까지 제법 하얗다.
칼갈이 교육을 마치고 원평으로 향한다.

갑오년, 그해 음력으로는 동짓달 스무닷새였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원평에 이르러 구미란에 진을 세우고 조일 연합 토벌대를 맞아 싸웠으나 패했다. 
그 싸움터였던 구미란 마을 뒷산, 뻗어 들어온 대나무가 소나무를 위협하고 있다. 

농민군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일본군과 관군은 원평천 건너 벌판에 포진했다. 오전 9시부터 양측은 접전을 벌였다.
산 위의 농민군이 지형상 유리한 위치를 점했음에도 일본군과 관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마침내 오후 4시가 지나면서 장위영 대관 최영학이 돌격대를 이끌고 산 위로 올라가 농민군과 접전을 벌여 37명을 사살했다 기록하고 있다.(
'순무진정보첩', '순무선봉진등록')
일본군과 관군의 사상자는 전혀 없었다.
더구나
관군 측 기록은 농민군 사상자를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라 하니 얼마나 많은 농민군이 이곳 전투에서 희생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조차 없는 것이다. 

농민군 무덤에까지 대나무가 등성 듬성 들어서 있다. 
구미란 무명 농민군 떼무덤은 피난 갔던 마을 주민들이 설 쇠러 돌아와 산과 들에 방치된 채 훼손되어 가던 농민군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했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피에 주린 들개들이 농민군 팔다리를 물고 다니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전한다.  

"천지가 동학꾼들 시체였디야. 동네 개새끼들이 팔뚝을 물고 댕기고 새들이 쪼아먹고 그러는디, 눈 뜨고 볼 수가 없응게, 여그다 묻고 저그다 묻고 묻었다드만, 저짝에다가도 저그 날맹이에다가도... 동네 산이 죄다 동학꾼 무덤이여"
(구미란 이옥선 할머니)

구미란 싸움터와 농민군 무덤은 사적지로 지정받지 못했다. 
이나마 형상을 유지하고 오늘에 전하는 것은 오로지 마을 주민들이 보살핀 덕이다. 
마을 분들은 떡과 밥을 시루째 올려 제를 지내왔다.

김제 지역에 발생한 조류독감으로 매년 치러오던 추모제가 취소되었다. 
오후 두 시경, 아직 아무도 다녀간 이가 없다. 
박행덕 의장님 추모제 때 챙겨놓았던 소주 한 병 부어드리고 노래 한 곡 불러드렸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진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웃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 가슴에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노래를 너무 성의 없이 불렀을까? 내려오는 길에 두 번 넘어졌다. 그중  한 번은 밤나무 아래서, 엉덩이에 밤가시 송송 박혔다.

원평 집강소

원평은 농민군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다.
전봉준의 동지이자 실질적 후견인이었던 김덕명장군이 이곳에서 농민군을 후원했고, 집강소 통치 시기에는 전봉준이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전주성 입성을 앞둔 농민군이 왕의 사자를 목 베어 돌아올 수 없는 혁명의 길로 접어든 곳도 이곳이었다.
불과 두어달만의 전세 역전, 농민군은 태인 방향으로 또 다시 후퇴했다. 

차를 몰아 태인을 스쳐 지난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 본대가 마지막 전투를 치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이  차창에 스친다. 
12월 23일, 그해 음력 동짓달 스무이렛날이었다.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은 농민군을 해산하고 잠행에 들어간다.
태인의 주산 성황산은 곧게 뻗은 국도 1호선에 절반 가까이 토막이 났다.

입암산

차를 좀 더 달려 임압산 아래 이르렀다. 
사진 정면 골짝 깊숙이 치고들어가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입암산성 북문, 잠행에 들어간 전봉준 장군 일행이 이 길을 따라 입암산성에 들었다.
12월 25일, 그해 음력 동짓달 스무아흐렛날이었다. 
나는 오늘 이 길을 따라 북문에 올라 갓바위까지 다녀오려 한다. 
장군님보다 앞선 걸음이니 적정을 살피려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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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의 눈발이 살아 있어 제법 고산 분위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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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를 수록 백설이 만건곤

길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드디어 북문 도착, 생각보다 눈이 많지 않아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작년 이맘 때 눈에 비하면 1/3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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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숨 둘리고 전인미답의 숫눈길을 헤쳐간다. 

북문에서 갓바위에 이르는 길은 궂이 성곽을 쌓아올리지 않아도 될 법한 가파른 사면에 축성한 성곽이 꽤 온전하게 남아 있다. 얼마나 고생하셨을까? 그 옛날 선조들의 노고에 절로 숙연해지는 길이다. 
하지만 눈이 덮어 아무것도보이지 않으니 그저 걷는다.
다행히 바람 매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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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는 조망이 매우 좋아 산 아래 조성된 정황을 살피기 좋은 곳이다. 
헌데 다시 눈이 내리고 날이 좋지 않다.
고속도로, KTX, 국철, 국도 등이 갈재를 향해 달린다. 
이런 굵직한 도로 등쌀에 이 아래 마을들은 진입로도 복잡하고 시끄럽고..

잠시 해가 나왔으나 이내 다시 사라지고..
장엄한 해넘이를 기대했던 나는 싱겁게 발길을 돌린다. 
별다른 적정은 없었던 것으로..
"장군님, 25일날 들어오셔도 문제 없겄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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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제비 발자국

산길을 오르던 내 발자국 위에 앙증맞은 발자국이 찍혔다.

날이 살짝 어두워지고 달이 솟았다. 
반달인데 보름달처럼 나왔다. 
사진 맨 오른짝이 갓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