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거머리처럼, 때로는 껌딱지처럼 늘어붙어 있는 외약다리 통증은 나를 여전히 산으로 내몬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 그 중에서도 산줄기를 탄다는 것, 그 일의 태반은  갈 길 내다보고 지나온 길 돌아보는 것이다.   

사람 사는거이나 산 타는 거이나, 내다보고 돌아보고, 돌아보고 내다보고..

혼자 산 길을 걷다 보면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많아지다가 어느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는 나를 본다. 

머릿 속이 텅 빈 채 그저 걷고 있는.. 

내다보고 돌아보는 것도 좋고, 생각이 사라진 그 순간도 좋고, 산은 여러모로 마음을 살찌운다.  


방장산도 그렇지만 고창을 지나는 영산기맥은 줄곧 전남북 도경계를 그으며 영광 쪽으로 흐른다. 

고창은 눈이 많은 고장이다. 병풍처럼 둘러선 영산기맥의 영향이 크다 하겠고.. 

하여 고창의 겨울 산은 때묻지 않은 심설산행을 하기에 좋다.

간밤 내린 눈이 다소간 쌓이고 간간이 눈발이 날리던 날, 영산기맥 산줄기를 타겠다고 양고살재에 섰다. 

양고살재에서 암치재까지  대략 22km쯤 되는 산길, 서쪽으로 향하는 길인지라 주로 오후 시간대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산길을 갈 요량이다. 

멀리서 온 산꾼들이야 하루 잔뜩 틈을 내 한번에 끝내버리는 것이 수월하겠지만 여기는 내 사는 고창 땅이다. 

틈틈이 짬을 내서 네번에 나눠 이 구간을 마쳤다.  


#1차 : 양고살재~수량동 고개 7.4km


1월 21일 오후1시 20분, 양고살재 고갯마루 살짝 못미친 작은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곧바로 맞이하게 되는 이름 그윽한 운월정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솔재까지 산길은 송전선 철탑 따라 닦인 임도를 걷거나 완만한 산길을 타며 편안하게 이어진다.  

네개나 되던 메모리카드는 다 어디로 가부렀을까?

사진기는 가져왔으되 필름 없는 빈 통이다. 

전화기가 사진기를 대신한다. 


고속도로도 없고 양고살재도 포장되지 않았던 시절 솔재는 장성 거쳐 광주로 가는 주요 도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한적하기 그지 없다.


솔재를 넘어 산길을 이어간다. 

산 한쪽을 긁어내고 편백을 새로 심어놓았다.

육중해보이는 산말랭이 너머 편백숲이 유명한 축령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갈 길 내다보고 지나온 길 돌아보고..

어느새 양고살재가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임도가 나오는가 하면 가시덤불이 옷깃을 부여잡기고 하고 뜬금없는 가시철망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시철망을 따라 걷는다. 


내가 있는 곳이 철망 밖인가, 안인가 궁금해질 무렵 수량동 고개에 당도했다. 

수량동이 어디메쯤 붙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갯길 새 주소가 수량동길이다.  

고개는 고창과 장성을 가른다. 고창 쪽으로는 사계절 수량 풍부한 은사고랑, 그래서 수량동인가?

네이버 지도에는 들독재라 표기되어 있다. 

4시 50분, 날이 저문다. 오늘은 여기까지..


안녕? 또 보자고..


#2차 : 수량동 고개~축령산~서우치 5.8km


폭설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눈이 꽤 왔다. 

1월 24일 오후 3시, 수량동 고개를 출발하여 오른 능선길.

전남북 의자가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메모리 카드를 찾다 찾다 새로 산다는 것이 그냥 왔다. 

오늘도 전화기가 사진기를 대신한다. 


산이 깊어갈수록 눈도 깊어져 무릎을 넘나든다. 


축령산, 정상에 이르러서야 조망이 트인다. 

그것도 2층으로 올려 지은 조망대에 올라서야 가능하고 돌아보기만 하라는 듯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은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축령산은 통 조망이 트이지 않는 산이다.

20년 전쯤 문수사에서 하룻 저녁 자고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올랐다 크게 실망하고 내려간 기억이 있다.   

축령산은 문수사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산, 문수사 현판에는 청량산이라 쓰여 있다. 

하지만 청량산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고 한때 문수산이라 불리기도 했으나 장성 사람들은 축령산이라 부른다. 

장성 쪽에 축령산 휴양림이 생기면서 아주 굳어진 이름이 된 듯 하다. 

과거 문수사에서 오르던 길은 숲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면서 전면 통제하고 있다. 

이래 저래 축령산은 고창 사람들에게는 그리 친근하지 않은 장성의 산이 되었다. 

멀리 방장산이 두 덩어리로 보이고 그 너머 입암산, 그 뒤로는 호남정맥 내장에서 백암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 산줄기가 되겠다. 


축령산 정상을 지난 능선길 어디메쯤일까? 

가야 할 길, 처음으로 조망이 터진다.

햇살 장막 뒤 사진 맨 오른쪽 솟은 산이 고산, 암치재는 고산 오르기 직전 고창과 장성을 잇는 고갯길이다.

암치재에 이르기까지 산길이 90도 정도로 꺾이며 능선을 갈아타는 느낌으로 인적 없는 산중 고갯길을 서너차례 넘어야 한다. 

산이 높지 않으나 인가가 멀고 깊다. 첩첩산중에 홀로 들어 있는 고독한 느낌이 오히려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축령산 정상을 지나면서 산길은 점차 거칠어져 야생의 느낌이 생생해진다.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길이 좋다.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는 두루봉이 되겠다. 

해가 뉘엿뉘엿 더 갈까 어쩔까 몹시 망설인다. 

축령산 능선을 버리고 다른 산으로 갈아타는 고갯길,  전남북 양짝에서 파고 들어온 임도가 닿을 듯 닿지 못한 서우치 고개에서 산행을 마친다. 

임도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이다 고수 두평으로 내려가는데 40여분.

6시 30분, 날이 완전히 저물고 말았다. 


#3차 : 서우치~청림고개 5.1km


험상궂은 사냥꾼 사륜구동 자동차도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돌아가고 임도를 얼마간 더 걷고 가시덤불을 헤쳐 어제 그 자리.

1월 25일 오후 3시, 서우치 고개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드디어 사진기가 제 구실을 한다. 

사진이 좀 다른가? 칙칙함이 사라지고 맑아진 듯..

역시 사진은 사진기로 찍어야 제 맛이 난다. 


어제 바라봤던 두루봉을 지난다. 

조망이 전혀 터지지 않는 잡목 우거진 봉우리, 이번 산길은 조망이 내내 터지지 않는다. 

조망이 터지지 않는 산길을 멧돼지 발자욱이 안내한다.  

정확하게 능선길을 잡아 길을 가는 멧돼지를 비롯한 날짐승 발자욱이 수두룩하다. 


살우치, 소를 잡아 묵었을까?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 고개 이름, 인근의 서우치하고도 연관이 있는 듯 하고..

고갯길 삼거리에는 포 사격장 탄착 지점이니 들어가면 부상 혹은 사망할 수 있다는 표지판과 초소가 서 있다. 하지만 산길은 초소 뒤 철망 안쪽으로 이어진다. 

멧돼지를 잡아보겠다는 사냥꾼 차량 바퀴자국이 어지럽다. 이 근방에서 사냥 중이라더니..

고개로 내려오는 산길에서 돼지 발자국, 개 발자국, 사람 발자국, 누구 핀지 모를 선홍색 핏자국까지 봤지만 돼지를 잡는 총소리는 듣지 못했다. 창으로 잡았으까?


여전히 조망 터지지 않는 산봉우리 소두랑봉, 무슨 의미일까?

소두랑 소두랑.. 어감이 정겹다. 필시 고창 말이다. 


저무는 인적 없는 산길을 멧돼지와 고라니가 교차해서 지나갔다.  

동시간대는 아니었겠지..

임도가 내려다보이는 고갯길, 청림고개인 모양이다. 

5시 50분, 오늘은 여기까지.. 

임도를 걸어 마을까지 20여분, 오늘도 나를 위해 달려오신 병길 형님과 반갑게 해후한다. 


#4차 : 청림고개~암치재 4km


설날, 차례상 물리고 아이들과 함께 마시는 음복주에 얼근해져서 한숨 자고 일어나야 정상일진대 오히려 정신이 맨숭맨숭해진다. 

점심 떡국까지 차려먹고 아이들 몰아 고창읍성으로.. 고창읍성에는 포켓스탑이 있다. 

고창읍성 성밟기놀이하는 부녀상 앞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포켓몬을 잡고 있다 했다. 

아이들 내려주고 산으로 간다. 이번에는 암치까지.. 구간을 마쳐야 한다. 


1월 28일 3시 20분, 구황산 오름길. 

지금껏 조망 터지지 않는 답답한 산길을 걸어온 것을 보답이라도 하듯 오름길 곳곳 산재한 바위에 설 때마다 시원스레 조망이 터진다.

그 사이 눈은 거의가 녹고 없다. 

고창읍내 아파트 단지가 살짝 보이고 멀리 두승산이 둥실 떠 있다. 그리고 방장산..


구황산 정상(500m), 높지 않은 산이지만 조망은 막힘 없이 탁월하다. 

지나온 산줄기가 한눈에 잡힌다. 


장성 방향


축령산 산줄기 너머로 추월산에서 갈라져나온 병풍지맥 산줄기가 살째기 모습을 드러낸다.  


가야 할 길, 암치재 너머 고산 그리고 고성산.


구황산 정상으로부터 500여미터 떨어진 구황산 서봉, 울울첩첩 산들이 사라지고 느닷없이 너른 들판이 발 아래 펼쳐진다. 

성송, 아산, 무장, 공음 일대의 풍요로운 고창벌. 

차마 산줄기라 하기 아려울 지경의 경수지맥 산줄기가 들판에 점점이 박혀 선운산으로 달려가고 멀리 선운산군은 소요지맥 산군과 어우러져 한덩어리로 보인다. 


상하, 해리 방면으로 장사산 너머 위도가 보이고..


아산면 너머로는 선운산 배맨바위가 또렷하다. 


고산 너머 석양이 깃들고 멀리 영광 앞바다에도 섬 하나 떠 있다.

불개미봉을 지난다. 불개미봉이라.. 

이 아래가 불개미재것제? 누군가 고개를 넘다가 불개미한테 공격을 받았을까? 

갑자기 영태 생각이 난다. 


마지막으로 고산 한번 더 쳐다보고..


5시 50분, 드디어 암치재.

가볍게 봤던 산길, 하지만 수월치 않고 때묻지 않은 야성미 넘치는 매력적인 산줄기 영산기맥.

좋다, 참으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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