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공원에 속한 산길은 봄, 가을 산불방지를 위해 입산이 통제되는 구간이 있다. 

지리산은 2월 16일부터, 덕유산은 3월 2일부터..

때문에 설 안에 남은 지리산 구간, 설 이후 덕유산 구간까지 통과하지 않으면 3~4월 내내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될 형편이다.

기왕지사 시작한 일 속도를 높여 빠르게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2월 7일 새벽 네시 반 집을 출발하여 다섯시 반 순창 대가리, 여섯시 반 성삼재에 당도했다. 

성삼재에 나를 내려주고 순창사람 정룡이는 바로 돌아가고 이따 다시 마중나오기로 했다.   



해발 1,100미터가 넘는 고갯마루임에도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한 날씨가 의외로 푹하다. 

남방 하나 걸치고 달빛 은은한 산길로 접어든다. 



고리봉 부근에 이르니 동녘이 희뿌연하게 밝아오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반야봉이 잠에서 깨어난다.



고리봉에서 만복대를 바라본다. 

멀리서 구름이 밀려들고 있다.  



반야봉과 달궁계곡, 달궁계곡은 아직 밤중이겠다. 



바람이 먼저 일어난다. 

어느덧 산은 운무에 휩싸이기 시작하고 산중에 거처를 마련한 산객은 아직 밤중인지 기척이 없다. 




거센 바람 몰아치는 만복대, 짙은 운무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옷을 꺼내입고 순창 고구마로 요기를 하며 생각한다. 

'내가 지리산에 크게 잘못한 일이 없으니 산 또한 나에게 모질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곧 안개가 걷힐 터이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릴지어다.'

몸이 얼어붙는다. 그래도 기다렸다. 20분을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문득 창백한 해가 비치더니 구름이 요동치며 걷히기 시작한다. 맨 먼저 반야봉이 육중한 몸을 드러낸다.

나는 지리산을 믿었고 지리산은 나에게 아량을 베풀었다. 







능선을 넘는 구름, 골짜기를 휘감아오르는 구름들 사이로 아찔한 풍경이 펼쳐진다. 

둘이 보다 셋이 죽어도 모를 풍경에 감탄하며 사진기를 들이대지만 어찌 이루 다 표현하랴. 

어림 반푼어치도 담아내지 못했다. 

다시 구름이 밀려들고 혼미해진 정신을 가다듬어 길을 나선다. 

북사면의 산길은 한겨울이다. 



정령치, 도로는 폐쇄되어 있고 휴게소는 휴업중이다. 


구불구불 정령치


정령치나 성삼재나 까마득한 옛날 마한과 진한 등 삼한시대의 영토분쟁과 관련이 있다. 

이 험준한 산고랑창에서 쌈질을 하면 얼마나 했을까? 

쌈질하러 올라오다 해 떨어지고, 지키러 올라오다 힘 다 빠지고.. 정작 만나서는 대충 싸우는 척 하다 막걸리나 한잔 걸치고 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고리봉이 또 나왔다. 

아까 지나온 고리봉(1,248m)과 구별하여 큰고리봉 혹은 남원고리봉이라 따로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백두대간은 여기에서 풍채 좋은 바래봉 능선과 결별하고 아득히 고도를 낮춘다. 

이제 지리산과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지리산을 지나오면서 무수히 보아온 경고 현수막, 정규 등산로만 벗어나면 거기는 곧 반달곰이 활동하는 위험지역이 된다. 

하지만 반달곰 할애비가 나온다 해도 나는 이 길로 가야겠다.  



노각나무도 이제 보기가 힘들어지겠다. 

한때 노각나무에 반한 나무 농사꾼과 함께 지리산을 여러차례 답사한 적이 있었다. 



소나무숲이 나타났다. 대간길은 소나무숲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진다. 

여기서부터 여원재에 이르는 내내 남원의 산은 온통 솔밭이다. 

남원 소나무 좋다는 말을 익히 들은 바 있는데 빈말이 아니다. 



하염없이 몸을 낮춘 백두대간은 고기리에서 잠시 60번 지방도와 몸을 섞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 농로가 되었다가 이내 동네 고샅길이 된다. 

고기리는 '고촌'과 '내기' 두 마을을 합쳐 만든 법정리로 우리말로는 '높은 터' 정도가 되겠다. 

대간이 몸을 낮췄다고는 하나 해발고도 600미터에 달한다. 

앞에 보이는 나지막한 산은 산이름도 따로 없이 그저 수정봉이라는 봉우리 이름만 하나 달고 있다. 

저래뵈도 저 산이 해발 804미터다. 

양짝에 논이 펼쳐진 농로길을 지나는 동안 아슬아슬하고 조마조마한 생각까지 들어 길 밑으로 혹시 수통이라도 지나지 않나 여러번 들여다보았다.

'산자분수령'인데.. ㅎ

다행히 수통은 발견되지 않았다.  



정오 무렵 노치마을 마을회관을 지난다. 할매들 두런거리는 소리,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문 열고 들어가 "할매 밥 좀 주쇼" 하고 싶지만 마음 뿐이다. 농민회 일로 왔으면 주저없이 들어갈 거인데..

나는 숙기가 없어서 어디 가서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샘물이 흘러넘치지 않고 그저 고여 있다. 샘물이 과히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몇모금 마셨다.

물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노치마을 뒷편에 있는 소나무 당산, 장중한 분위기의 소나무 노거수 석주가 나란히 서 있고 당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마을 앞의 눈 쌓인 지리산 자락을 내려와 논길 밭길, 동네 고샅을 지나 소나무 사잇길로 백두대간이 이어지고 있다. 



솔밭 사이 능선길 따라 수정봉으로 향한다. 



수정봉 지나 입망치, 입망치는 '삿갓립'에 '바랄망'자를 쓴다. 산 아래 갓바래(입촌) 마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좌우튼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조용히 지나갔다. 



지나온 수정봉을 뒤돌아본다. 

여기에서 보는 수정봉은 꽤 험준한 산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산 좌우의 고도차가 큰 탓이다. 


양지산성


음지산성


옛 성터가 남아 있는 봉우리를 두어개 넘어 백두대간은 다시 사람사는 동네로 곤두박질쳐 여원재에 이른다. 

양지산성, 음지산성은 산아래 준향마을에서 이름을 따 준향산성으로도 불리는 삼국시대 성으로 대부분 허물어져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축조되었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여원재에 이르기 전의 이 구간은 대간을 넘고자 하는 농민군들을 막기 위해 민보군을 배치하여 경계한 지역이긴 하나 실제 큰 전투는 없었다.  



대간길 바로 아래 빨간지붕집은 민박을 치며 막걸리로 산객을 유혹한다. 

심지어 주인 아자씨와 눈까지 마주쳤지만 나는 그냥 지나왔다. 



백두대간 고갯길이 어찌 생겼나 궁금했는데 그저 평범한 고갯길이다. 남원시와 운봉읍을 넘나든다. 

여원재에는 내륙 깊숙히까지 들어와 노략질을 임삼던 왜구와 왜구의 손을 탄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주막집 주모, 그리고 이 지역에서 왜구를 섬멸한 이성계 등에 얽힌 오래된 내력이 스며 있다.  



고갯마루에서 남원시 방면으로 200여미터를 내려간 도로 아래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마애불상.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왜구를 섬멸할 계략을 일러준 노파가 자결한 주모의 원신이며, 이성계가 이를 기려 암각하고 사당을 지어 '여원'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여원재는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고갯마루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표지석. 

이건 뭐 기념비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이러저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노라고 기술하고 말던가 차라리 세우덜 말던가 할 일이지..

'농민군이나 민보, 수성군이나'라니.. 계엄군이나 시민군이나 나라사랑하기는 다 마찬가지라는건가?

양심수나 정치검찰이나, 박종철 열사나 이근안이나 모두가 나라와 겨레를 위한 마음은 바를 바 없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말이다. 

이승만, 박정희 묘똥을 참배하겠다는 거의 넋 떨어진 문재인 수준이로군.. 

나태하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역사인식에 한숨이 나온다. 



조선 총독부에 의해 파괴된 황산대첩비. 

왜구를 섬멸하고 위세를 떨친 이성계 장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그를 기린 황산대첩비.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넘긴 부패무능한 이성계의 직계후손. 

능멸당한 대첩비.. 참 거시기하다. 



남원 운봉은 동편제의 발상지다. 동편제와 서편제는 호남정맥을 사이에 두고 좌우가 갈린다. 


여원재 아래 운봉 살짝 둘러보고 인월 사는 삼봉이네 집에 가서 법 얻어묵는 것으로 백두대간 2차 산행을 마무리한다. 

지리산 종주로 훈련소 마치고 이제 막 자대배치 받은 백두대간 이병쯤 된다 생각하면 되겠다. 

앞으로 갈 길이 험난하겠다. 당장 설 쇠고 나서는 덕유산 신풍령까지 단숨에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겠는데 산에 갈 날짜를 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는 하고 말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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