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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야기

다랑쉬굴 발굴과 그 뒷 이야기

농사꾼 조선낫 2009.01.29 09:04

다랑쉬굴의 슬픈노래다랑쉬굴의 슬픈노래 - 10점

제주민예총4.3문화예술제사업단 지음/각






다랑쉬굴 발굴 10년을 기념하여 제주 민예총 4.3사업단에서 발간한 책.
2002년에 발간하였으니 그로부터 다시 7년이 흘렀다.
발굴 당시 적나라하게 드러난 참혹상이 언론에 보도되고 관련자들의 육성 증언이 이어졌다.
다랑쉬굴 학살은 '중산간지역을 완전히 불살라 없애고 마을주민들을 집단학살하는 초토화작전'시기에 자행되었다.
다랑쉬굴은 4.3항쟁 과정에서 자행된 토벌과 학살만행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랑쉬굴의 희생자들은 어린이, 부녀자 등이 포함된 가족단위 민간 피난민이었다.
그러나 정부와 행정기관 일부 언론은 군경토벌대에 의한 무차별 학살정황이 드러나자 '발각되자 집단자살' '무장 유격대의 비밀아지트'라는 등의 색깔 공세로 일관하다 다랑쉬굴을 서둘러 봉쇄해버리고 수습된 시신은 유족을 회유하여 바다에 흩뿌리고 말았다.  

그러나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는 결코 끝나지 않았다.
다랑쉬굴의 참혹한 죽음은 4.3항쟁의 역사적 복원과 진상규명 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오늘에 살아 있다.
지난해 개관한 4.3 평화기념관에 가면 발굴 당시 다랑쉬굴 내부 모습이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제주 여행객들의 필독을 권한다.


 
    [블로그]'4.3의 기억! 항쟁을 말한다'에서 공개한 동영상입니다.

2009/01/09 - [볼거리,여행] - 제주 4.3 평화기념관
2009/01/05 - [볼거리,여행] - 다랑쉬오름을 오르다.
 
댓글
  • 프로필사진 김금복 참, 답답한 일입니다. 굴에서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있렀다고 하여 양민들이라고 오해를 많이 하는데, 정말 완전한 오해요 착각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동광리와 애월(빌레못굴)에서 생활하다가 발각되어 희생된 사람들은 순수한 양민들임이 맞지만, 다랑쉬굴은 전혀 아닙니다. 그들은 다랑쉬굴 토벌사건 바로 전날, 세화리를 대습격하여 주민 43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138채의 가옥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남로당 입산파 무장 게릴라들과 연관이 깊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우익인사의 글을 접하고 판단하여 이 글을 올리는 게 아닙니다. 종달리 채정옥 옹의 증언 하나만 가지고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종달리 마을을 순찰하다가 상도리 출신 좌익분자(남로당) 오길용을 비롯한 쳥년들에게 납치/포섭되어 같이 생활했다고 합니다. 이는 채 옹도 같은 남로당원이 되어 같이 활동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반강제적이고 피동적인 활동일 테지요. 같이 납치된 김호준은 말을 안 들어서인지 그날밤 바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증언에는 구좌면당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남로당 구좌면당이라는 말입니다. 세화리 대습격 다음날 군경이 토벌에 나서서 다랑쉬굴을 발견하게 되었고 굴 속 사람들은 질식사를 당했지요. 채 옹은 남로당 구좌 총책 정권수의 지시로 다랑쉬굴에 가서 시신울 수습하라고 합니다. 그는 시신들을 가지런히 모으고 천을 덮어두었다고 하지요. 굴 속 여인들은 좌익 폭도들에 대한 취사를 담당하던 사람들이었고, 어린이는 그 중의 한 여자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주4.3사건의 원초적인 원인을 제공하여 제주를 피로 물들게 한, 오늘날의 공산당원들이었고, 굴은 그들의 아지트였던 것입니다. 세화리는 우익성 마을이라, 토벌 상대가 안되었던 반면에, 무장대의 습격을 받았고, 굴 속의 생활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였음을 알 수 있으니, 세화/하도/종달애서 피신해간 양민들이긴커녕, 무장대의 일원들이었던 겁니다. 당시 세화리장 김병수 씨도 토벌에 참가하였는데, 1993년경 경찰 진술조서에서 "양민들이 왜 굴 속에 숨어있겠습니까? 무장 공비였음이 틀림없습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진실은 밝혀져야 하고 역사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면서, 왜 이렇게 명약관화하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진실을 인정하기 어려워 하고, 엉뚱하게 "다랑쉬의 슬픈 노래"이니 뭐니 여론을 호도하고 있답니까? 그들은 그렇게 죽음으로 자신들의 죄값을 이마 다 치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이념에 속아 넘어간 이념의 희생자일지언정, 제주4.3의 진정한 희생자는 결코 아닙니다. 내 고향은 종달리 서동이며, 채 옹의 얼굴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깡패 수준의 군경들을 동원한 강경 진압은 극악한 역사적 과오이긴 했습니다. 2018.05.20 19:18 신고
  • 프로필사진 김금복 채 옹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미군정에서 실시한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하여 종달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다른 4명과 함께 좌익 폭도들(학교 동창 오달용 등)에게 붙잡혀서 협박에 굴복하고 그들과 같이 생활했다고 분명히 증언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는 반강제적인 남로당원이 된 것입니다. 그의 증언에는 구좌면당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남로당 구좌면당이라는 말입니다. 제주4.3에 대해서 대정면당, 한림면당, 남원면당 등의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이렇게 그 당시 남로당 세력이 숫자에 비해서 매우 조직적이고 세력이 강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해방 직후 만들어진 건국위원회 역시 좌익 세력에 의해 조직된 겁니다. 미군정은 이들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과 협력하여 군정을 실시하다가, 좌익 색채가 짙어지자, 탄압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공교롭게 발생한 3.1절 사건을 통해서 관성력을 얻은 좌익 세력이 4.3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남로당 구좌 총책 정권수는 다랑쉬굴이 토벌 당했으니, 가서 시신들을 수습하라고 채 옹과 다른 2명을 보냅니다. 채 옹은 다랑쉬굴의 시신들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거나, 마을에 알리는 식으로 요란을 떨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남로당원이고, 죽은 사람들도 같은 남로당원들이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렇게 토벌 당하여 죽게 될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채 옹은 한국전쟁 발발로 거기에 참전하며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과거 좌익 활동의 경력 때문에, 당국의 종용으로 우도초등학교 교편을 마지막으로 강제적으로 교단에서 내려오게 됩니다. 좌익 무장대들 중에는 무기가 모자라서 창과 칼 등을 갖춘 이들이 많았습니다. 굴 속에서 그것들이 발견된 것입니다. 세화리 대습격으로 충격을 받은 군경은 이튿날 바로 보복활동에 나섭니다. 당시 세화리장 김병수 씨도 같이 참여한 사람인데, 그의 증언에는 "양민이 왜 이 굴에서 살겠습니까? 그들은 입산파 무장 공비들임이 틀림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어느 글에 이런 것이 나옵니다. "당시 다랑쉬 오름은 구좌면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렇다면 굴 속에서 오랫동안 살던 사람들은 양민이기는커녕, 유격대 당사자였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2018.05.23 05: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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