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다.
연말연시를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국회 앞에서 싸우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칠 않다.
허나 어쩌랴 기왕 나선 길 제대로 밟고 돌아가야 할 일이다.
새해를 맞는 그럴듯한 해맞이를 기대하였으나 궂은 날씨로 작파하였다.
한라산 산행 역시 많은 눈으로 정상산행이 통제되었다는 소식이다.
우리는 일정을 바꾸어 다랑쉬오름을 먼저 찾아오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제주도 청년들이 막아나선다.
눈이 쌓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눈이 내리면 아예 운전할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모양이다.
눈이 많은 고창에서 갈고 닦은 눈길 운전 경험을 내세워 우격다짐하다시피 하여 길을 나선다.

투쟁 당시 바다에 뛰어들었던 방파제. 눈보라에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다.

중문시내를 지나는 길 FTA투쟁 당시 골프장을 통해 신라호텔 회담장에 육박했던 일, 바다에 뛰어들어 회담장으로 향하던 일 등을 회상하며 말들이 많아진다. 
당시 투쟁에 원정투쟁단 3천여명, 제주도민 1만여명이 참여하였다.
그렇게 싸워 저지 파탄내고자 한 한미FTA를 한나라당은 날치기 비준하려 하고 있다. 
 
우려했던 눈은 표선면을 지나자 그리 많이 내리지 않았다.
성산을 지나 구좌읍 경계에 들어서자 흐린 날씨임에도 곳곳에 솟아오른 오름들이 시야에 가득히 차기 시작한다. 
'월랑봉'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월랑봉은 다랑쉬의 한자식 표현이라고 한다.
목장길같은 소로를 따라가니 금새 다랑쉬오름에 당도한다.

야트막하고 만만해보인다.


능선이 부드러워보이는 것이 오르기가 만만해 보인다. 기슭에 조성된 공동묘지를 따라 오르니 이내 편백나무 조림지를 지나 억새밭을 따라 급경사면이 펼쳐지며 길이 정상으로 곧장 이어진다.
보기와는 영판 다른 급경사에 세찬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이 솟는다.

절반쯤 오른 지점. 멀리 성산일출봉과 '땅끝'이라는 의미의 지미봉이 보인다.


그저 한발한발 오르는 것 외에 도리가 없다. 뒤쳐진 일행을 기다리자니 바람이 너무 심해 서있을 수가 없다.
정상에 이르러 보니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는 북쪽 사면 폐쇄된 등산로를 타고 올라왔다. 오름보호를 위해 지정된 등산로를 이용하라는 팻말이 서 있다.
우리동네 말로 겁나게 애실력없는 순간이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뒤쳐진 일행이 올라온다. 포기하려는 것은 어거지로 끌고 올라오는 모양이다.
나중에 들으니 "제주도민의 한이 서린 항쟁오름인데 그냥 말 수 없다는 생각에 이 악물고 올라갔다" 한다.

정상에 서니 사면팔방으로 거칠것 없는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탁 트인 시야 때문에 '항쟁 당시 다랑쉬오름은 토벌대의 동향을 감시하고 봉화를 올려 항쟁의 기세를 올리는 구좌면 유격대의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는 증언이 실감난다. 
머지 않은 곳의 높은오름이 오름을 도는 내내 시선을 압도한다.
해안가에 솟은 지미봉과 길게 누운 우도, 성산일출봉이 손에 잡힐 듯 하다.
여전히 짙은 구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라산이 아쉬울 따름이다.

지미봉과 우도가 보인다.

성산일출봉과 윤드리오름

높은오름

동거미오름과 높은오름


분화구 바닥이 아스라하다.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이 여러군데 있으나 내려가지 말라는 표지판도 표지판이려니와 다시 오를 일을 생각하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 깊이가 115m로 백록담의 깊이와 같다 한다.
설문대할망이 흙을 한줌씩 집어 오름을 만들면서 한줌 집어놓고 보니 너무 도드라져 주먹으로 탁 쳐서 패인 자국이라 한다.

다랑쉬오름 분화구. 분화구 뒤로 용눈이오름이 보인다.

분화구 바닥에 돌담과 작은 탑들이 보인다.


오름을 한바퀴 돌아 동쪽 사면에 서니 아담하고 귀여운 오름이 보인다. 
아끈다랑쉬오름이다. '아끈'은 버금가는, 둘째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 사이에 다랑쉬마을이 있었다 한다.
아끈다랑쉬오름을 바라보며 내려선다. 내려가는 길 역시 가파르기 짝이 없다.

아끈다랑쉬오름.

밑에서 본 아끈다랑쉬


다랑쉬오름을 내려와 길을 나서니 얼마 가지 않아 다랑쉬마을 터에 이른다.
마을이 있었던 흔적은 무성한 대나무 숲과 마을을 지키던 팽나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팽나무 옆에는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4.3항쟁 당시 유격대와 주민의 연계를 끊고자 하는 토벌대의 무자비한 소개 작전으로 불태워진 중산간마을의 상당수가 재건되지 못하고 폐허로 변했으며, 다랑쉬마을은 참혹한 학살현장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다랑쉬굴이 발견되면서 항쟁과 학살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 것이다.
다랑쉬굴은 지금 커다란 돌로 막혀 있다 한다.
참혹한 학살현장이 드러나자 당황한 당국은 축소왜곡에 나섰고 유족들을 회유하여 유해를 화장해 날려버리고 굴은 막아 진실을 은폐하려 한 것이다.
1992년도의 일이니 그사이 많은 세월이 흘렀다. 특별법이 제정되고 기념관이 건립되었으나 4.3항쟁과 학살의 온전한 진실규명명은 오늘도 진행형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 들어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4.3항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며 이는 특별법을 사문화시키고 4.3특위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

'잃어버린 마을 다랑쉬' 표지석과 팽나무

마을 터에서 바라본 다랑쉬오름

다랑쉬마을 포지석


돌아오는 길 한참을 벗어나 달리다보니 먼발치에 다랑쉬오름이 그 진면모를 보여준다.
오름에 올라 사방을 경계하며 토벌대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봉화불을 올렸을 유격대와 제주도민의 항쟁을 생각한다.
토벌대의 무자비한 학살을 피해 음습하고 비좁은 다랑쉬굴에서 평화로운 새 세상을 꿈꾸었을 피난민을 생각한다.
토벌대가 피운 매캐한 연기에 질식해 죽어가며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 분들의 원혼을 온전히 풀 날은 언제쯤일까?
우리는 오늘도 그날을 향해 달린다.

다랑쉬오름


2009/01/29 - [책이야기] - 다랑쉬굴 발굴과 그 뒷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