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묵은 단 하나의 계모임, 오래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산행. 

사람 없는 호젓한 산을 골라내라 했다. 해서 찾았다. 순창 여분산. 

여분산은 회문산 옆자리에 옴팍하게 들어앉아 호남정맥과 연결되며 쌍치면과 구림면을 가른다. 

여분산과 회문산 사이 신광사재는 피노리에서 피체된 전봉준 장군이 나주로 압송된 길이기도 하다. 

언젠간 가봐야지 하다가 드디어 날을 잡았다. 

산에 오르기는 더없이 좋은 날씨,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잠잠하다. 

밤재에서 올라 운항마을로 내려오는 길을 잡았다. 

 

밤재에서 바라본 내장 방면의 산군

 

 

 

 

 

아무도 가지 않은 숫눈길을 걷는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눈이 깊어지고 바람이 몰아붙인 능선의 눈이 허벅지를 넘나든다. 

대략 한시간 가량을 걸어 당도한 세자봉 인근, 자그마한 바위 위에 서니 조망이 툭 터진다. 

내장에서 백암, 추월산 지나 산성산으로 용트림하듯 이어지는 호남정맥 산줄기가 장엄하다. 

 

저 멀리 내장, 백암 산줄기가 굵직하다.

 

남하한 정맥길은 추월산 줄기를 타고 다시 북상한다.

 

심하게 요동치는 호남정맥 탓에 산세가 사뭇 치열하다.

 

 

헬기장과 산불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세자봉. 하지만 조망은 시원치 않다. 

세자봉을 지나면 산길은 한동안 내리막길을 탄다. 

거친 숨과 땀으로 올려놓은 피 같은 고도가 한없이 떨어진다. 

적설량이 가장 많은 구간, 내리막길이라 다행이다. 

 

 

 

 

옴팍하고 따뜻한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한바탕 땀을 쏟아 삼계봉에 도착. 

여기에서 깃대봉 지나 회문산으로 가는 길과 여분산 상봉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갈림길에서 깃대봉 방향으로 진행,  신광사재에서 쌍치 방면으로 내려가 내를 건너면 바로 피노리다. 

녹두장군 일행이 백양사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산길만을 이용해서 피노리로 향했다면 필시 이 길을 지났을 것이다. 

 

깃대봉 방향

 

여분산 상봉 방향

 

여분산 상봉

 

회문산

 

“여기 여분산은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기록될 전적지네. 혹 남부군 영화를 봤나. 잘못된 것이지만 거기 보면 1951년 3월 19일인가 국방군 대 병력이 회문산을 포위하고 비행기 폭격에 포격을 가하면서 개미떼처럼 능선을 타고 산골짜기로 공격하는 장면이 나오네.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거야. 장비 면에서나 수적으로나 월등한 적에게 회문산을 내주고 전북 도당과 산하 기동부대가 덕유산으로 이동하던 때였어. 무장부대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는데 저 아래 금산골 대시멸 등 고라당에는 적이 원 포위해서 압축해왔기 때문에 장성, 담양, 정읍, 순창, 임실 등지에서 쫓겨 온 지방 기관 및 투쟁 인민들 만여 명이 집결해 있었대. 그 많은 사람이 무장 부대의 뒤를 따라가다가는 그들에게 짤려서 다 죽을 것이고. 사령부에서는 안전지대인 쌍치로 비무장 대열을 빼돌리기로 작전을 세웠던가 봐. 이 여분산을 지키고 있던 기포병단(후에 407연대) 한 개 중대에 여분산을 포기하면 수많은 인민이 희생된다. 인민들이 쌍치 안전지대로 이동을 완료할 때까지 여분산을 사수하라는 엄중한 전투 명령이 하달된 거야. 여분산 상봉을 빼앗기면 그 수많은 인민이 죽임을 당하거나 생포될 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이 여분산 전투가 남쪽 유격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치열했던 거야. 비행기 폭격에 수백발의 포탄이 날아오고 열세 번이나 기어오른 적을 반 돌격해서 물리쳤대. 온종일 육박전도 하고. 여기에 보루가 있었어. 보루 안에 막심 중기를 걸어놓고 중기 분대가 정상에서 결사전을 하다가 다 전사하고. 중기 부사수였던 여(汝) 동무만 혼자 중기를 부여잡고 쏘아댔는데 출입구에서 손들어라 하고 총을 쏘더래. 거의 동시에 땅에 떨어져서 구르는 쇳소리가 들려오고. 휙 돌아보니까 군인이 총을 꼬나들고 있었다는구만. 미제 엠완은 마지막 탄알이 나가면 자동으로 케이스가 밖으로 튀어 나가게 되어 있지 않나. 총을 다룬 동무라 적의 총에 총탄이 없다는 것을 알지 않겠어. 그냥 총알처럼 달려 나갔대. 아마 눈에서 불꽃이 튀었을 거야. 무섭게 달려들자 겁먹은 국방군이 흠칫 뒤로 물러섰고 그 틈에 여 동무는 눈이 남아있는 저 북쪽 급경사로 굴러서 살아남았대. 한 개 중대 전원이 전사하고 단 한 사람이 살아남은 거야. 

 

적이 여분산을 점령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인민들은 다 안전지대로 빠져 나갔대. 뒤에 여 동무가 우리 중대 소대장으로 왔을 때 여 동무로부터 여분산 전투에 대해서 자세히 들었구만. 아마 그 해 6월이나 7월이 아닌가 싶네. 우리가 이 여분산 상봉에 올라왔는데 전호 속에 하얀 뼈만 쌓여 있었어. 육탈이 된 머리와 팔, 다리, 몸의 뼈 토막이 섞여서 쌓여있더구만. 60여 동무들의 백골을 접한 우리는 피 터지는 아픔으로 눈물을 흘렸어. 어금니를 물고 동무들의 뒤를 따르리라 결의를 다졌네. 주변에 흩어져 있던 유골을 모아다가 함께 묻어 드렸어. 인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영웅들. 이곳에 동지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한 탑을 세워야 할 텐데, 여러분 몫인지도 몰라.” 

 

- 통일뉴스, 임방규의 빨치산 격전지 답사기(임방규 : 비전향 장기수, 전 통일광장 대표) 

 

수많은 희생을 담보로 확보한 퇴로는 짐작컨대 회문산과 여분산 사이의 고갯길인 '신광사재'임이 분명하다. 

'투쟁 인민'들은 전봉준 장군이 압송당한 바로 그 길을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해방 지구였던 쌍치 방면으로 퇴각한 것이다. 

불과 6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제와 미제 두 제국주의에 유린당하고 맞서 싸우고.. 그 투쟁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다시 밤재, 저 멀리 여분산 상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호젓한 산.. 골라도 지대로 골랐다. 산행하는 내내 단 하나의 등산객도 만나지 못했으며, 단 한 사람의 족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밤재(10:30) - 세자봉(11:20) - 삼계봉(13:20) - 여분산 상봉(14:00) - 운항(15:20)     7.5km 약 5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