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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이야기

한라산 깊은 곳 이스렁오름

농사꾼 조선낫 2016.05.28 13:22

몇해 전 5월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가는 오름길에서 바라본 이스렁오름과 그 주변 경관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해 두었더랬다. 

언젠가는 가고 말리라.. 그리고 4년이 지나 그 곳을 다녀왔다. 

그것도 연중 가장 바쁜 농사철 고동목에 작정하고 집을 나섰다. 

선거를 마친 이후 장거리 여행을 꿈꿔왔다. 

본래 흑산도를 벼르고 별렀으나 성사시키지 못했다. 

한데 왕복 6만 900원 하는 비행기삯이 나를 결단케 했다. 

흑산도보다는 제주도가 심리적으로나 물질 기술적으로 훨씬 가깝다.

오후 늦게 출발해서 아침 일찍 돌아오는 짧은 2박 3일, 


다녀와서 정밀하게 다시 고증해보니 몇해 전 내 시선을 잡아 끈 오름은 쳇망오름이었다. 

쳇망오름을 이스렁오름으로, 이스렁오름을 어스렁오름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쳇망오름은 다시 기회를 잡아 가야 되겠다. 갈 날이 있겠지..


해장에 일찍 출발하려던 계획은 엉뚱한 문제로 틀어지고 말았다. 

메모리카드를 빼놓고 빈 사진기를 들고 왔으니 참 나 원..

꼼꼼히 챙긴다고 몇 번을 돌아보면서 집을 나섰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아마도 출발하기 직전까지 트렉터 굉음에 시달린 탓이리라. 

한껏 어기적대며 안먹는 아침까지 챙겨먹고 초등학교 앞 문구점에서 4기가짜리 메모리카드를 가까스로 장만했다. 

밥을 먹는 동안 한라산에서 소나무 재선충에 의한 고사목이 발견되었다는 흉흉한 뉴스가 흘러나온다. 

한라산의 미끈한 적송들이 떠오른다. 

큰 일이다. 아무쪼록 무탈하길 기원한다. 



1100고지 휴게소에 당도하니 8시 반이 넘었다. 출발에 앞서 1100고지 습지를 둘러본다. 

한라산 국립공원 안에 들어 있는 이스렁오름은 1100고지 습지 주변에서 스며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 허나 어쩌랴 길은 가야 하고..

습지를 둘러보는 탐방객들이 제법 붐빈다. 부지런한 사람들..

습지 너머 숲 뒤로 볼레오름과 한라산 산정 부근이 살짝 비친다. 

날은 참 좋다. 



적당한 지점에서 숲으로 들어간다. 삽시간에 한라산 밀림에 안겼다. 

숲은 참으로 청정하기 짝이 없다. 숲 바닥은 온통 조릿대 밭이다. 

이슬이 많이 채인다. 눈밭에서 쓰는 행전을 착용한다. 가져오길 잘 했다. 

비록 사진기는 빈 걸 들고 왔지만 행전을 챙길 생각을 한 내가 매우 기특하게 여겨졌다. 

따로 마련된 길이 없다. 밀림에 드니 조망도 허용되지 않는다. 

전화기에 설치된 산 네비게이션, 산길샘에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렵겠다. 

수시로 확인하며 방향을 잡아나간다. 


곰취 군락


습지에는 곰취가 지천이다. 

한잎 뜯어먹어보니 향이 더없이 좋다. 다들 성한 모습으로 있는 걸 보니 한라산 노루들이 곰취맛을 모르는 모양이다. 


박새 군락


박새도 참으로 많다. 꽃망울 맺힌 꽃대를 일제히 올렸다.

조릿대가 뒤덮은 발 밑은 온갖 장애물들로 지뢰밭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함부로 내딛었다가는 발목 상하기 십상이겠다.

여유 있고 신중하게 한발 한발을 뗀다. 



사람의 흔적을 본다. 

깊은 산중 거처의 흔적은 이런저런 상상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돌에 낀 이끼만큼이나 세월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야성이 철철 넘치는 사나운 개, 사람을 만나면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 같은..

추리소설 '바스커빌 가의 개'가 떠오른다. 

아연 긴장한다. 불법 출입을 감시하는 감시원? 제주에 들개 많다는데 들개 무리? 한라산 노루?

어느것 하나 선뜻 고개 끄덕여지는 가설이 성립되지 않는다.

제주 사는 토종 사람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애써 노루겠거니 생각을 해보지만 설마 노루가 이토록 사나운 소리를 낼까 싶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이 곳 저 곳에서 들리더니 눈 앞에서 날짐승 하나 튄다. 노루다. 소리의 주인공은 한라산 노루..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사람을 이토록 놀래키다니 개시끼들 같으니라고.. 

소리 한번 들어보시라. 



부석


계곡의 맑은 물과 물에 뜨는 돌, 부석



밀림 속을 두시간 가까이 걸어 드디어 이스렁오름 정상 근처에 도달했다. 

처음으로 조망이 터진다. 

이스렁 자락과 어스렁, 볼레오름이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지고 그 너머 영실 기암이 살짝 시야에 잡힌다. 

이스렁오름은 옛날부터 그리 불렀을 뿐 그 뜻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한다. 


이스렁오름


노루 소리도 알아채지 못한 토종 제주 사람이 볼레오름과 광활한 밀림을 배경으로 물을 마신다. 

서북쪽이 터진 볼레오름의 굼부리가 확연하게 포착된다. 

과거에는 초원이었음직한 바닥에 발목을 넘지 않는 매우 키 작은 조릿대들이 빽빽하다. 


이스렁오름

이스렁오름

이스렁오름


볼레오름은 산철쭉이 한창이다. 

새로이 피어나는 것도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전성기를 지나 살짝 노화되었다. 


이스렁오름


정상 습지의 돌탑 너머 만세동산에서 영실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고 다시 그 너머로 백록담 화구벽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스렁오름

이스렁오름


마음은 막 만세동산으로. 영실로, 백록담으로 달려간다. 

허나 그저 바라볼 뿐..

그래 오늘은 그저 이렇게 바라보자고 나선 길이다.


도시처녀나비


정상 습지와 꽃밭을 누비고 다니던 도시처녀나비. 

전국 각처에 분포한다지만 쉽게 보기 힘든 나비, 그리고 제주도에는 한라산 1100고지 이상의 고지대에 서식한다 했다. 

딱 그 자리에서 녀석들을 본다. 

굉장히 많은 개체가 청춘시절읕 구가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곳곳에서 짝짓기가 성행하고..

이름에 걸맞게 까칠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 도무지 한군데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날아만 다닌다. 

혹여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접근이라도 할 양이면 또 금새 날아가버리는..

운 좋게도 밤금 짝 짓기를 마친 피곤한 녀석(?)이 제주사람 손에 올랐다. 



햇살 따뜻하고 바람 선선하다. 한없이 눌러앉아 있고 싶지만 길을 나서야 한다. 

이스렁에서 벌써 한시간을 놀았다. 

마음은 자꾸 한라산의 중심부를 향하는데 실제 가야 할 길은 다르다. 

사진에 보이는 움푹 패인 개활지는 이스렁과 어스렁 사이의 습지, 습지를 지나 보이는 작은 봉우리가 어스렁오름이다. 

어스렁오름은 김종철 선생의 오름나그네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스렁과 대비하여 어스렁이라는 이름이 붙은 듯..



드넓은 한라산의 품을 가슴에 새겨넣으며 어스렁, 볼레로 이어지는 길을 잡아 나선다. 

내려서는 길을 잘못 잡아 잠시 혼동을 겪었다.  



세상에 그 어떤 정원사가 이토록 멋진 정원을 꾸며낼 수 있을까?

자연과 세월이 빚은 걸작이다.

바닥에는 설앵초가 깔리고 관목인 산철쭉, 그리고 키 작은 교목, 화산이 배출한 바위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설앵초


설앵조, 시들어가고 있으나 여전히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스렁오름


이스렁 한번 돌아보고 어스렁 숲 속으로 들어간다.


큰앵초


어스렁 숲 속에는 큰앵초 군락이 있다. 


어스렁오름


어스렁 정상부의 붉은 리본, 정상에는 쓰러진 교목들이 즐비하다.



어스렁의 쓰러진 나무 위에 오르면 영실 방면 조망이 열린다. 

손만 뻗어도 가 닿을 듯.. 마음은 다시 한번 한라산 정상부를 향해 달린다.


세복수초


오직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작고 가녀린 세바람꽃


영실


볼레오름에 이르니 영실 고라당이 정면으로 보인다. 

"볼레오름은 볼레낭(보리수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보통 불래악(佛來岳)으로 통한다. 존자암에 비추어 그럴 듯한 호칭이다"(김종철 저, 오름나그네)

볼레오름 기슭에 있는 존자암(터)는 제주도에 처음 불교가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고찰이다.  


볼레오름


드넓은 산록, 숲의 바다


붉은오름


볼레오름 정상부에서는 서북쪽으로 터진 굼부리 너머 조망이 시원하다. 

정면에 덩치 큰 붉은오름이 버티고 있다.  

붉은오름은 삼별초 최후의 항전의 옛터로 전해진다. 

"항바두리 토성에서 패주한 김통정 휘하의 삼별초군이 최후의 항전을 시도하다 전멸, 온 산을 피로 불들였다고 전해지는 붉은오름"(김종철 저, 오름나그네)


이스렁오름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면 지나온 이스렁, 어스렁 오름이 보이고 그 너머 쳇망오름이 손짓한다. 

쳇망오름.. 가 볼 날이 있겠지.. 

볼레오름 정상에서 절대 앉지 않고 산정을 휘젓고 다니는 나비들과 한바탕 씨름하다 소득 없이 발길을 돌린다. 

산제비나비였던 듯..

볼레오름에서 존자암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간다. 

길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던 지금까지와 달리 길이 뚜렷하다. 

예까지 오는 동안  길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 것인지 헤어졌다 다시 만났다 한 것인지..

내려오는 도중 영실에서 1100고지 휴게소로 가는 송수관을 만났다. 

산행 초입에서 잠시 만났던 송수관이다. 이 아이를 따라가면 왕오름 장오름을 거쳐 다시 1100고지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존자암으로 방향을 잡았다. 



존자암 범종각 옆 계곡에 이르러 발을 식힌다. 

햇볕에 그을리지 않은 발이 눈부시게 하얗다. 

그리고 우리는 절을 찾았던 불자의 모습으로 한라산 너른 품에서 빠져나왔다. 

우리 비록 출입이 제한된 지역을 다녀왔으나 이 또한 불법의 이름으로 용서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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