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입춘이 지나자 비로소 겨울이 왔다.
최강 최장 한파와 폭설, 강추위와 눈을 겁나 좋아하는 나도 좀 징허다.
눈은 실상 길게 내릴 뿐 엄청나게 오지는 않았다.
밤사이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날, 나는 산으로 갔다.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절간 같은 집, 고양이 발자국 따라 사람 길 내고..


껄막 눈 치워 찻길 내고..

선운산 경수봉 아래 인적 끊긴 마을에 도착했다.
방장산, 입암산을 두고 고민이 있었으나 차 대기 좋고 돌아 나오기 쉬운 선운사를 택한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길을 택해 산을 오른다.
장송의 기세가 늠름하다.

경수봉 지나 심원 방면, 산길 거친 이 능선을 탈까 했으나 역시 차 둔 곳으로 돌아 나오는 것이 낫겠다 생각한다.

경수봉 아래 전망 바위에 서니 함박눈이 펑펑..
세상이 온통 흑백, 오래된 사진 같다.

선운산 안쪽 고라당과 바깥 고라당을 산줄기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산은 낮으나 골이 깊어 고창 지역 야산대들이 선운산을 거점으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 한다.

오늘은 저~기 저만치만 가자.

역력한 눈과 코, 귀, 마치 개 대그빡을 닮았다.

솜뭉치를 얹어놓은 듯, 어제 내린 눈은 솜털처럼 가벼웠다.
무거운 눈은 농민들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다.

마이재를 향해 나아간다.
바람이 부려놓은 능선의 눈이 허벅지를 탐한다.

마이재에서 현미국수와 아침에 만든 두유, 설탕 당류 제로라는 카카오 머시기로 끼니를 잇댄다.
지나온 눈길이 생각보다 빡세 석상암으로 내려갈까 했으나 인적이 나타나 길을 내놓았다.
숫눈길을 헤치는 재미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공력으로 편한 길을 간다.
수리봉 너머 포갠바위 지나 하산하기로 한다.

수리봉에서는 선운사 본절이 잘 보인다.
그러니 선운사에서도 수리봉이 잘 보이는 것이겠다.

어떤 것이 개이빨산일까?
의견이 분분하다 한다. 나는 오른짝 봉우리에 한 표 던진다.

선운산 가장 내밀한 곳..
천왕봉, 천마봉, 배맨바위, 비학산, 쥐바위, 사자바위, 투구바위, 병풍바위가 보인다.

저 멀리 비학산 아래 골짝에서 발원한 도솔천이 사자바위와 천마봉 사이를 흘러 인천강으로 나간다.
천마봉 아래 도솔암 마애불 골짝이 고창지역 야산대가 가장 마지막까지 활동했던 곳이라 한다.

선운사 고라당 속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사자바위, 투구바위 능선, 저기는 봄이 오거든 가자.

선운사 바깥 심원 방면 고라당은 바다로 열렸다.

아조 옛적에는 바닷물이 어디까지 밀고 들어왔을까?

만돌 계명산 너머 대죽도 소죽도, 그 너머 공군 사격장으로 쓰이는 미여도, 그리고 형제섬, 저 멀리 위도.

포갠바위 지나 하산, 드디어 사람 꼴을 본다.

어젯밤에도 눈이 내리고 입춘 한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다시 폭설에 갇힌 산을 오르진 못할 듯하다.
입춘한파가 제아무리 매섭다 한들 그 끝이 있기 마련이고 그 자리 봄이 서성이고 있을 것이니..
입춘대설 또한 그야말로 봄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쇨 쇤 지가 엊그젠데 낼 모레가 대보름, 세월이 쏘아논 화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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