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놀고..
봄비 나리던 날
봄비 나리던 날
2022.03.13간밤 달무리 지더니 점드락 봄비가 오락가락, 메마른 땅을 적시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그래도 꽃들은 앞다퉈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내고 나는 사진기를 손에 쥐었다. 집안 곳곳 산수유 물기를 한껏 머금고 샛노래졌다. 마당 한구석 잔뜩 부풀어 오른 동백꽃 봉오리, 나도 한껏 부풀어 올라 선운사엘 갔다. 막걸리 한 잔 적시고.. 대웅전 뒤 동백숲, 선운사 동백은 벌써 폈더라. 참으로 붉기도 하다. 저 산에도 화색이 돌 것이다, 아마도 부지불식간에.. 이 담벼락도 초록초록해질 것이고.. 사람들 통 안 가는 은밀하고 으슥한 곳, 굴뚝새 한 마리 촐랑대며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한참을 쫓아다녔다, 봄비를 맞으며.. 끝내 잡지 못했다, 공장에 간 렌즈가 참으로 그리웠다. 동박새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란 말이지.. 곱기..
콩나물국
콩나물국
2021.12.01나는 콩나물국을 좋아한다. 하여 이따금 콩나물을 사곤 한다. 허나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가물에 콩 나듯 하니 자칫 버리기 일쑤, 콩나물 사 둔 지 또다시 일주일. 콩나물국을 끓인다, 늦은 밤이었다. 콩나물 한 움큼, 소금 간 적당히, 뚜껑 닫고 팔팔.. 이때다 싶을 즈음 다진 마늘 적당량, 청양고추 서너 개, 부족한 간은 새우젓으로.. 시원하고 칼칼한 콩나물국, 이건 뭐 식은 죽 먹기다. 단지 콩나물국이 끓었을 뿐인데 술 생각이 잇따른다. 이럴 양이면 황태를 좀 넣을 걸.. 눈치 볼 사람, 망설일 이유 없다. 콩나물국 한 보새기, 술 한 잔 딱 한 잔. 속이 훈훈해진다. 이건 약이다. 겨울비는 나리고..
메밀국죽, 국과 죽의 경계에 머물다.
메밀국죽, 국과 죽의 경계에 머물다.
2021.10.22의문의 배앓이 이후, 나았다고는 하나 여파가 있다. 굶는 게 가장 편할 듯 하나 뭐라도 먹는 쪽으로 결정하고 속 편할 음식을 찾는다. "메밀국죽 먹어요"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나에게는 메밀쌀이 있다. 메밀쌀 살포시 두 주먹 집어 열심히 조랭이질, 정선된 메밀쌀은 흡사 싸레기다. 메밀을 껍질째 삶아서 다시 딱딱하게 말려 도정한 것이라 했다. 하여 요즘 시판되는 메밀쌀과는 많이 달라보인다. 이 메밀쌀 두 줌에도 정선 농민의 땀이 배어 있다. 멸치 다시물 만들어 메밀쌀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물은 과도하게 많다 싶을 정도가 적당하다. 된장 아까라 말고 한 숟가락 담뿍 떠 넣는다. 된장 만으로 간을 하니 감이 중요하다. 열심히 끓이다가 메밀쌀이 부풀어 퍼질 무렵 약간의 묵은지, 청양고추, 대파를 썰어 넣는다..
장칼국수 말고 장국수
장칼국수 말고 장국수
2021.10.07날이 꾸무럭하니 장칼국수를 먹고 싶은데 칼국수를 만들 재간은 없고 냉장고에 생면은 있다. 칼국수나 국수나 다 같은 밀가리 것이니 뭐 거기서 거기겄지. 장국을 먼저 만들고 국수를 넣으면 그게 장국수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먼저 멸치 다시물에 양파 작은 것 하나, 양송이 두 개. 콩나물 반 주먹.. 더 넣을 게 없네. 이제 생면을 넣고 고추장과 된장으로 간을 한다. 고추장은 매콤함과 달콤함을, 된장으로는 간을 맞춘다. 고추장을 한 숟가락 넣었다면 된장은 반 숟갈 정도.. 조리 시간이라야 물 끓는 시간, 국수 삶아지는 시간.. 나는 이런 간편한 음식이 좋다. 잠깐 사이 뜨끈하고 국물 걸죽한 장국수가 만들어졌다. 늘 양 조절에 실패하지만 남기는 법은 없다. 요즘 부쩍 밀가리 것이 땡긴다. 살찔까 걱정이지만 다시 ..
가을엔 국수를..
가을엔 국수를..
2021.10.03가을이다. 나는 당산나무 아래 앉아 있다. 들판은 황금빛, 시원한 바람 솔솔 불어온다. 들판 너머 두승산이 둥실 솟았다. 잔디밭 가상자리 호박 두 덩이 넝쿨째 들어왔다. 엊그제만 해도 영락 없는 애호박이었는데 며칠 사이 몰라보게 컸다. 비가 내린 탓이다. 호박 한 덩이 따 들고 생각한다. 어찌 먹어야 하나? 나는 국수를 좋아한다. 더구나 가을이니 국수가 좋겠다. 멸치 국물에 새우젓 간, 호박 썰어 넣고 마른 새우에 청양고추로 풍미를 더한다. 냉장고에 생면이 있다. 면은 따로 삶아 찬물에 가신 후 끓는 국물에 풍덩.. 상이 차려졌다.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칼국수 면이라야 했는데 아쉽다. 그래도 맛있다. 잘 먹었다. 이렇게 끼니 하나를 해결한다.
서울로 가는 길
서울로 가는 길
2021.09.111970년대 초반, 그 시절 서울로 가는 길은 어떤 길이었을까? 농촌의 수많은 청춘남녀와 밤 봇짐 싼 일가족을 실은 새벽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면 생면부지의 땅에 내려야 하는 그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새 세상에 대한 경외와 새로운 삶에 대한 포부도 있었을 것이고 고향을 잃은 비탄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이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다만 해마다 명절이면 양손에 선물 보따리, 신작로 빡빡하게 고향집으로 향하던 귀성 인파의 종종걸음이 눈에 선연할 따름이다. 나는 1978년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1989년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줄곧 방학이 그리운 학생이었다. 나는 향수병을 심하게 앓았더랬다. 이 노래를 알고 난 이후 꽤 오랫동안 입에 달고 살다시피 했다. 나는 '앞서가는 누렁아 왜 따라나서는 ..
울릉도, 그리고 박정희
울릉도, 그리고 박정희
2021.09.01우리는 울릉도 곳곳에서 박정희와 대면했다. 어떻게든 박정희와 엮어 '기승전 박정희'를 위해 애쓴 흔적들과 도처에서 맞닥뜨렸던 것이다. 울릉군수 옛 관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이듬해 10월 울릉도를 방문한다.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 그무슨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었던 시절이지만 대통령이나 의장이나 뭐가 달랐겠는가? 울릉도로서는 감지덕지할 일이었을 것이고, 박정희는 돌아간 후 울릉도 종합개발계획이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그 후 울릉도는 70년대 초반 오징어 잡이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딱히 박정희의 공이라 할 바는 아니지만 그락저락 울릉도 근대화의 은인으로 기억될 만도 하다. 그렇다 하나 일제 강점기 식민 관료의 관사로 쓰이던 건물 그대로 일식 요정 냄새 풍겨가며 박정희 개인을 숭배하는..
저동 일출, 섬을 떠나다.
저동 일출, 섬을 떠나다.
2021.09.012박 3일이 4박 5일이 되었다. 울릉도에서 처음 맞는 마지막 일출을 보기 위해 숙소를 나선다. 때 맞춰 일출 보겠다고 부지런히 걷고, 북저바위와 각을 맞추느라 왔다 갔다 했다. 아침을 먹는다. 어디서 무엇을 먹을까를 두고 고민하다 찾아간 집에서 우리는 이틀 후 확진자가 될 손님하고 함께 밥을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주일이나 지난 후에 알게 될 일이고, 밥은 잘 먹었다. 2박 3일이 4박 5일이 되고 일주일 후에 다시 일주일 휴가, 참으로 호화찬란한 여름 뒤끝이로다. 시간이 남는다. 우리는 관해정 후박나무 그늘 아래 앉아 오래도록 쉬었다. 앉아 쉬자니 흑비둘기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안 보이던 녀석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후박나무 열매는 녀석들의 주식이나 다름없으니.. 흑비둘기만이..
지새지 말아다오 저동의 밤아
지새지 말아다오 저동의 밤아
2021.08.31아침이 밝았다.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면서 잦아들었다. 촤르륵 촤르륵~ 돌밭을 구르는 파도소리 차분한데 오늘도 배는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린다. 내일은 들어오겄지, 암만.. 학포는 먹을 것이 없다. 나리분지 씨겁데기술로 목을 축이며 하루를 시작한다. 석포 독도 전망대에서 독도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11년 전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죽도를 봤는데 관음도로 오인했다.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거대한 와불, 관음보살을 떠올렸던 것이다. 석포 일출 일몰 전망대에서 관음도는 일찍이 '방패도'라는 이름으로 수토사의 기록에 나타난다. 관음도는 총독부가 제작한 조선지형도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본래 이름과는 어떤 연관성도 없다. 울릉도의 지명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다양한 경로를 거치게 되는데 토속 지명이 ..
우산국은 어디에?
우산국은 어디에?
2021.08.30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대풍구미(대풍감)의 바람과 압도적인 풍경, 하늘을 날던 매까지 모든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태하령 옛길을 걸어 넘으려던 계획을 바꿔 버스로 이동한다. 우리는 버스 안에서 포항에서 배가 출항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받았다. 타고 나갈 배가 없어진 것이다. 어찌할 것인가? 사동을 지나 도동으로 가 차를 빌렸다. 차는 저동에 있었다. 이제 먹어야 했다. 꽁치 물회를 먹자고 찾은 집, 울릉도식 꽁치 물회는 물이 없다. 그리고 전혀 비리지 않고 맛있다. 예전 울릉도 사람들은 강고배를 타고 나가 손으로 꽁치를 잡았다 한다. 그 시절로부터 유래된 음식이니 맛이 깊을 수밖에 없겠다. 저동 어민식당, 이 집은 울릉도에서 우리가 두 번 찾은 유일한 식당이다. 뒤늦은 후회지만 마지막 날 아침에도 우리는..
대풍구미(대풍감)
대풍구미(대풍감)
2021.08.292박 3일 울릉도 마지막 날. 우리의 계획은 대풍감 일대를 둘러보고 태하령 옛길을 넘어 남양까지 걸어가 버스 타고 사동으로 이동하여 배를 타는 것이다. 6시 30분, 꽤 서둘러 숙소를 나선다. 밤사이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면서 그쳤다. 구름 많은 좋은 날씨다. 흠뻑 젖어 빨아둔 옷과 신발도 보송보송 잘 말랐다. 조짐이 좋다. 대풍감을 조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태하 등대로 올라야 하는데 등대 인근까지 데려다주는 모노레일은 운행을 하지 않는다. 일대가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이 역시 지난해 태풍 때문이다. 걸어서 오른다. 가파른 길이지만 거리가 짧아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목적지는 향목 전망대, 등대와 맞닿아 있다. 전망대에 이르니 바람이 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쾌한 바람이 바다로부터 절벽을 타고..
대황토구미, 태하
대황토구미, 태하
2021.08.26독도에 다녀온 우리는 오징어 내장탕으로 속을 구슬렸다. 탕이라기보다는 국이라 할 만한데 이걸 우리 동네 사람들이 끓였다면 어땠을까를 상상해 본다. 울릉도 사람들은 오징어 내장탕과 꽁치 물회로 속을 푼다 했다. 내일은 꽁치 물회를 먹어보자 다짐한다. 행남 해안길을 걸어 도동으로 가려 했으나 비가 내린다. 비야 무릅쓰면 되겠지만 지난해 태풍으로 끊긴 길이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울릉도 해안지대는 너덜너덜하다. 해안도로는 사면팔방 곳곳이 공사 중이며 사동, 남양, 태하 등 서쪽 지역 포구들에는 지난해 태풍 피해의 처참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울릉도는 한탄한다. 태풍이 동해상으로 빠져나갔다고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때 울릉도는 비로소 태풍 맞을 준비를 한다고.. 울릉도는 그저 독도를 생각할 때나 덩달아 떠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