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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농민회총연맹 이광석 전 의장이 전북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그가 출마를 결심한 배경에는 “민중당과 함께 농민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는 전농 정치방침이 있다. 이광석 전 의장은 4년 전에도 전북 도지사에 출마해 10%가 넘는 지지를 획득한 바 있다. 당시에는 “통합진보당을 조직적으로 지지한다”는 전농 정치방침이 있었다. 

전농은 통합진보당이 강제해산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조직적 지지 방침을 유지했다.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주도하여 민중당 창당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전농은 박근혜 정권에 의해 해산된 통합진보당을 부활시킴으로서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이어지는 진보정당 운동의 적통을 복원해냈다. 



이광석 전 의장은 철저히 전농의 조직방침에 의거하여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왔으며 단 한번도 ‘조직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의 요구에 철저히 부응해왔다는 것만으로는 그의 결단의 과정에 비낀 망설임과 주저함 등 숱한 인간적 고뇌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차분한 노후를 준비해온 이광석 전 의장에게 도지사 출마 요구는 사실 '아닌 밤중의 홍두깨'와도 같은 것이었다. “왜 이번에도 나란 말인가? 안될 말이다. 젊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완강히 거절했다. 군산을 재차 방문하여 출마를 거듭 권유하던 박행덕 전농 의장은 “그라문 저 삐쳐서 가불라요” 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광석 전 의장이 마음을 바꿔 출마를 결심한 것은 김선동 전 의원이 다녀간 이후였다. 

이광석 전 의장의 재임기간인 2010~2014년은 김선동 전 의원이 국회에서 활약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 기간 둘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2011년 말 한미 FTA 국회 비준안 날치기가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 김선동 의원을 만난 이광석 의장은 “몸으로 막아달라, 묵숨을 걸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즈음 이광석 의장은 안주머니에 칼을 품고 다녔다. 의장이 연단에 오르면 전농 실무자들은 긴장된 가운데 연단 아래에서 대기해야 했다. 다행히 그 칼은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로서 순교자적 신념을 간직한 이광석 의장에게는 평생의 짐이 되고 말았다. “김선동 의원은 직을 걸고 최루탄을 터뜨렸는데 나는 멀쩡히 살아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말씀을 자주 하셨고 이번에도 하셨다. 



이듬해인 2012년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으로 당선된 의원 중 누구도 ‘농해수위’를 맡아 나설 적임자가 없었다. 

남원, 순창 강동원 의원이 있었으나 그는 통제불능이었다. 재선에 성공한 김선동 의원을 이광석 의장이 다시 만났다. 농해수위를 맡아달라 요구했고 김선동 의원은 이를 수용했다. 노동운동에 투신해 노동자로 살아온 김선동 의원이었지만 전농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광석 의장 임기 말 쌀 목표가격 인상투쟁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아스팔트와 국회에서 수레의 양바퀴가 되어 투쟁을 견인했다. 단돈 4천원 인상을 고수하던 정부안을 깨고 1만 8천원 인상을 이뤄냈다. 농민들의 요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전농과 통합진보당, 이광석 의장과 김선동 의원  상호간의 마음을 읽는 원내외 투쟁이 긴밀하게 결합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선동 의원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국회 최루탄 투척’이 이유였다. 



진보정당 의원과 대중조직 대표자간에 맺어진 숭고한 동지적 의리가 이광석 전 의장이 최종 출마를 결심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출마 결심 이후 이광석 전 의장은 더 이상의 망설임 없이 농민을 대표하는 민중당 도지사 후보로서의 발걸음을 힘차고 담담하게 내딛고 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농민직접정치 시대를 몸으로 여는 이광석 후보에게 다함없는 지지와 연대를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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