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실에서 돈내코까지, 한라산의 진면모를 보았다.
서귀포 중산간마을 회수, 폰깡 농사 짓는 문철이네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7시까지는 항에 도착해야 하고 바쁜 걸음이 아닌 할랑할랑 느긋한 기분으로 가고 싶어 6시가 되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을 나서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에 말짱 드러난 한라산, 하얀 옷을 입은 백록담이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끌어 당긴다.
"가긴 어딜 가, 내 품에 안겨 봐"
홀린 듯이 달려가 차를 세우니 영실 입구, 아직 등산객은 아무도 없다.
오후 1시 30분 발 완도행 배를 예약해두고 오르기 시작하니 6시 30분이다.
상고대가 피어오른 영실기암을 바라보며 경사 급한 길을 한시간여 오르니 문득 시야가 트인다.
이스렁오름 뒤로 안덕, 한림 지경의 오름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누구 발자국일까? 앙증맞기 짝이 없다.
이따금 장끼 홰치는 소리가 조용한 산을 울려대더니 고산의 키 작은 숲 사이로 숨어드는 장끼가 보인다.
구상나무 숲을 지나니 광활한 구릉지대가 나타나고 그 너머로 백록담 화구벽이 늠름하다.
태양하고 맞짱떠야 하니 사진기가 제 구실을 못한다.
제주조릿대와 철쭉 군락이 아스라하다.
한라산 노루가 해장부터 왠놈이 올라왔나 하고 쳐다본다.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까마귀 가르릉거리고..
때까치 땍땍거린다.
윗세오름 대피소에 당도하니 8시 30분. 대피소를 지나 돈내코 방면 길을 찾다가 어리목 방면으로 잘못 내려서고 말았다. 윗세오름 대피소에서 백록담으로 오르던 길 말고 다른 길이 있을거라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백록담으로 향하다 서북벽 통제소에서 오른편으로 서벽에서 남벽을 휘감으며 길이 이어진다.
화구벽을 중심으로 휘돌아가는 길, 편하고 순한 길이 이어진다.
철쭉이 피면 장관이겠다.
선박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1시 반 완도행 배는 결항이란다.
5시 배로 예약하고 4시까지 가기로 한다.
발걸음에 한결 여유가 붙는다.
남벽 대피소를 지나면 본격적인 내리막이 시작된다.
고도를 낮추면서 뒤돌아보는 화구벽은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배웅한다.
서귀포라 70리 해안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범섬, 섶섬 등이 바다 위에 떠 있다.
평궤 대피소를 지나면 화구벽과 작별을 고하고 길고 지리한 밀림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돈내코 코스 탐방 안내소 앞을 지난 시각 11시 30분.
영실에서 돈내코까지 약 15km 되는 거리, 5시간이 소요되었다.
거의 쉬지 않고 걸었으나 사진 찍고 풍경 바라보느라 다소 느릿하게 걸었을 것이다.
주차장에 이르니 서귀포 열리 사는 은일이가 마중나와 있다.
고마운 사람, 꽤는 귀찮을 육지 손님을 군말 없이 영실까지 데려다 준다.
택시비 아낀 것으로 나는 점심을 사고..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는 각시에게 거짓말 해가며 홀린 듯 다녀온 한라산이 꿈결같다.
영실에서 돈내코에 이르는 한라산길은 또 다른 한라산의 면모를 볼 수 있는 좋은 길이다.
영실계곡을 급하게 차고 오르면 남벽 대피소까지는 그야말로 느긋하면서도 여유로운 산행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돈내코를 출발하여 영실에 이르기보다는 내가 걸은 이 길이 한결 나은 좋은 선택이었음을 자부한다.
철쭉이 필 때 다시 가고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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