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급한 전갈을 받고 달려간 순창.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검찰 수사관들은 집을 뒤지고, 논밭에 나가다 달려온 순창 농민회원들이 마당에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 막걸리 한잔 하라는 말에도, 미리 연락하고 왔으면 청소라도 해놓았을 것 아니냐는 비아냥에도 아무런 대꾸 없이 집을 뒤지는 놈들, 집주인이 건네주는 천년초 효소 음료는 넙죽 잘도 받아먹는다. 호랭이나 물어갈 놈들.. 밥은 먹고 이 지랄들인가?
거실 탁자 위에 놓인 판화 한 점, 홍규 형이 새겼다. 아마도 순창 농민회 영농발대식에 내놨던 모양이다.
일기
안도현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니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