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전봉준 장군 큰따님 전옥례 여사 묘소
전봉준 장군 큰따님 전옥례 여사 묘소
2020.12.03호남정맥 진안 구간을 지나며 전봉준 장군 큰따님 생각이 났다. 산길을 타고 진안으로 피신해 일가를 이루고 살았다는.. 그이가 걸었을 산길이 대부분 호남정맥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왔더랬다. 허실 삼아 인터넷을 검색하니 그이의 묘소가 진안 부귀면에 있다는 기사가 검색되었다. 그이의 묘소는 마이산과 모래재의 중간쯤 되는 곳(부귀면 신정리)에 있었다. 한 번은 헛걸음, 두 번 걸음만에 찾은 그이의 무덤은 잘 단장된 가족묘의 가장 윗자리에 모셔져 있었다. 왼쪽이 생전의 전옥례 여사. 오른쪽은 강금례 여사(전봉준 장군 둘째 딸의 딸) 장군의 둘째 따님은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다. 사진 속 두 분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내 보기엔 두 분이 많이 닮았다. 아래는 장군의 큰따님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당..
피노리 가는 길 3
피노리 가는 길 3
2020.03.23낮 12시, 밤재에 다시 섰다. 피노리 가는 길 마지막 구간을 간다. 오늘은 대략 삼십리길, 여분산을 지나 피노리에는 어둠이 내린 후 도착하는 것으로.. 이미 춘분이 지나 해가 충분히 길어졌다. 내내 끝없이 이어지는 참나무 숲길. 때론 유순하나 때론 사나운 깔끄막.. 전반적으로는 할랑할랑 걷는 편안한 산길, 따스한 봄 햇살에 겨울 남방이 부담스럽다. 꽃도 없는 황량한 숲에 호랑나비 너울너울 많이도 날아다닌다. 성체로 겨울을 난 뿔나비도 제 세상을 만났다. 내 꿈속에 너인 듯, 니 꿈속의 나인 듯.. 꿈꾸듯 걷다 만난 녀석들 운우지정을 나누고 있다. 저기 멀리 추월산은 남쪽으로, 내장산은 북쪽으로 달린다. 그 중간쯤 잣방산이 솟았다. 지나온 길이 훤히 가늠된다. 잣방산은 몹시 기운 넘쳐 보인다. 뭔가 기가..
피노리 가는 길 2
피노리 가는 길 2
2020.03.17피노리 가는 길, 두 번째 구간을 간다. 본래 하루 잡아서 끝낼까 했으나 하루 점드락 산에 들어 있기가 민망하여 오전 한나절 가마골 지나 밤재까지 대략 이십 리 길을 갈 요량으로 길을 나섰다. 겨울답지 않았던 겨울을 지내고 맞는 꽃샘추위가 제법 매섭다. 지난번 잣방산에서 내려선 곳은 쌍치면 둔전리와 복흥면 석보리 경계 지점이라 보면 되겠다. 잣방산 산 덩어리를 빙 에둘러온 추령천을 다시 만나 보 위로 물을 건넜더랬다. 추령천 건너 적당한 지점에서 곧바로 산에 붙는다. 산 이름은 별도로 없고 성주봉이라는 봉우리 이름만 있더라. 동네 냥반들한테 물으면 뭔가 산 이름이 있을 듯한데.. 성주봉 봉우리 못 미쳐 곳곳에 조망터가 있다. 오른짝에 잣방산, 외약짝 멀리 추월산이 보인다. 추령천이 잣방산을 빙 에둘러 흐..
피노리 가는 길 1
피노리 가는 길 1
2020.03.07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 장군은 농민군 본대를 해산하고 잠행에 들어간다. 그리고 불과 닷새만에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마지막 닷새, 그는 무엇을 생각했고 그의 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관군의 기록에는 김개남을 만나 재기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적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용한다. 하지만 전봉준 자신은 "서울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전봉준 공초) 말했다. 어떤 것이 되었건 그의 길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신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을 끝내지 않았으며 새로운 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으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따름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남긴 공초 기록과 유시, 역사에 남긴 마지막 발언들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
우금티, 송장배미, 봉황산 넘어 충청감영으로..
우금티, 송장배미, 봉황산 넘어 충청감영으로..
2019.12.14무슨 놈의 겨울이 이리 따뜻한가, 눈도 안 오고.. 용교리 지나 장성 갈재 아래 입암, 배후에 입암산이 버티고 서 있다. 잠행 길 나선 전봉준 장군이 스며들었던 입암산을 바라보다 그이의 발자취를 거꾸로 밟아 올라간다. 태인, 원평, 전주 스쳐 삼례, 여산, 논산, 노성 지나 이인. 4차선 국도가 시원스레 잘도 닦였다. 한 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잘하는 짬뽕집은 쥔양 반이 독감 걸려 문을 안 열었다.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 속을 채우고 칼칼한 목도 축인다. 이인은 농민군 2차 봉기 후 농민군 주력부대와 관군 간에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11월 19일(음력 10월 22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이 이인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급파된 관군을 맞아 취병산에 진을..
곰티재에서 우금티까지..
곰티재에서 우금티까지..
2019.12.061894년 11월 9일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인 우금티 전투가 개시되었다. 당시 음력 11월 9일은 양력 12월 5일, 오늘이다. 내 오늘은 꼭 우금티에 가리라 다짐해 두었다. 집에 돌아와 장작 몇 개 뽀개 불 지피고 나니 어느덧 한낮, 늦었지만 출발이다. 삼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삼례 ic 부근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조성돼 있다. 농민군이 실제 집결했을 삼례 역참과는 동떨어진 곳,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농민군의 혁명정신이 땅값 싼 외진 곳으로 유배당했다. 역참터 부근에 있다는 기념비는 찾지 못했다. 대숲에 둘러싸인 쇠스랑이 잘 다녀오라 손짓한다. 삼례에서 공주까지 1시간 남짓, 효포 초등학교를 목표로 달려왔다. 곧게 뻗은 1번, 23번 국도를 달려오는 동안 은진, 논산, 노성..
피노리에 눈이 내린다.
피노리에 눈이 내린다.
2014.12.0412월 2일, 120년 전 전봉준 장군 일행이 피노리를 찾은 날이다. 11월 27일 밤부터 시작된 전봉준 장군의 잠행은 이 곳 피노리에서 닷새만에 막을 내렸다. 밤 사이 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피노리에는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를 비롯하여 전시관, 수련관 등이 조성되어 있다. 농민혁명의 위대한 지도자가 다른 곳도 아닌 순창 땅에서 피체되었다는 사실이 순창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수치로 여겨지는 듯 이를 조금이라도 만회해보려는 노력의 흔적이 여기저기 배어 있다. 잠군님을 밀고한 자가 순창이 아닌 정읍 사람임을 커다란 바위에 큼지막하게 새겨 넣었다. 정읍 사람들이 발끈하고 나서 항의하기도 했으나 돌을 치우거나 문구를 수정해야 할만큼 거세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찌 됐건 전봉준 장군에 대한 속죄의식..
녹두장군 따라 입암산성에서 청류암까지..
녹두장군 따라 입암산성에서 청류암까지..
2014.11.27입암산성 넘어 청류암까지 녹두장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한 2차 시도에 나섰다. 입암산성에 들기 전 묵었던 곳은 입암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흥리 차치구의 집이었다 한다. 대흥리에서 거의 직선으로 가 닿을 수 있고 막바로 산을 넘어 산성에 들 수 있는 곳은 임암산 턱 밑 마을 만화동이다. 만화동을 출발하여 산성 북문을 넘는 직등길이 정읍 방면에서 입암산성에 드는 가장 가차운 길이 되겠다. 그리고 입암산성에서 청류암으로 가는 길은 남창계곡을 거의 다 내려간 지점에서 몽계폭포 쪽 하곡동 골짝을 더듬어 올라 백암산 사자봉을 거쳐 청류 계곡으로 내려서는 것이 가장 빠르겠다. 그 길을 가 보는디.. 만화동 위 농로가 끝나는 지점이 곧 산으로 드는 입구가 된다. 북문까지 1.5km,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주릉으로..
입암산성에서 녹두장군의 발자취를 더듬다.
입암산성에서 녹두장군의 발자취를 더듬다.
2014.11.24우금티 전투에서 패한 전봉준 장군과 농민군은 태인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군대를 해산했다. 갑오년이 저물어가던 11월 27일의 일이다. 그 후 전봉준 장군은 입암산성, 백양사 등을 거쳐 12월 2일 순창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불과 닷새동안의 짧은 기간 장군 일행의 행적은 12월 1일 하루를 제하고는 대개 밝혀져 있다. 그 중 온전히 산길만을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입암산성에서 백양사(청류암)에 이르는 길을 밟아보고 싶었다. 꽤 오래된 숙원사업같은 것이었다. 박홍규 화백의 동학농민혁명 120주년 기념 판화전 '피노리 가는 길'에 함께 하면서 그 욕구는 더욱 강해졌다. 갑오년 2갑자, 게다가 11월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문제는 어떤 경로로 입암산성에 들었을까를 가늠하고 그 길을 따르는 것이다. 먼..
전두환이 정화한 황토현에 친일작가가 세운 녹두장군이 서 있다.
전두환이 정화한 황토현에 친일작가가 세운 녹두장군이 서 있다.
2009.03.05'갑오농민전쟁의 숨결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전북도연맹 농업과학원 현장기행을 다녀왔다. 다음날 비가 온다는 예보 탓에 인원이 반토막 나고 말았다. 소설 녹두장군의 저자 송기숙 선생은 농민군과 관군 사이에 맺어진 '전주화약'의 수수께끼에 대해 모내기철을 코 앞에 둔 농민군들의 발싸심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술회하였다. 몸은 전쟁터에 있으되 마음은 이미 고향의 논밭으로 달려가던 농민군들을 더 이상 전장에 붙들어둘 수 없었던 전봉준 장군 등 농민전쟁 지도부의 고심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론이다. 하물며 전쟁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 역사기행인 바에야 제끼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비도 오신다는데.. 황토현 기념관 주차장에 모인 답사단은 전두환 5공 시절 세운 구 기념관부터 둘러보았다. 해설과 길안내는 정읍..
판화 '녹두장군' - '89 박소래
판화 '녹두장군' - '89 박소래
2009.02.24홍규형의 판화 '녹두장군' 1989년 작품이다. 내가 농사를 짓겠다고 고창에 내려온 1989년 바로 그 해이다. 그새 20년이 지났다. 1991년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농민회 재정사업으로 홍규형 판화를 판매하고 남아 책상 서랍속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발견하고 거금 5만원을 들여 표구하였다. 그날로부터 오늘까지 녹두장군은 항시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 형형한 눈빛으로...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
2009.02.11홍규형으로부터 최근 창작한 판화를 선물받았다. 선운사 도솔암 마애미륵불의 배꼽에서 비결을 꺼내는 동학도들의 이야기를 판화로 형상화하였다. 소나무판에 그림을 새기고 찍어낸 첫번째 작품을 나에게 주는거라 했다.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없다. 마애석불을 바라보는 인간군상의 태도와 표정이 다양하다. 그 중에는 현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구성진 해설이 있다. 각자 상상해보시라. 선운사 도솔암 마애석불은 거금 삼천년전 검단선사의 진상이라고 하며 그 석불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 그 비결이 나오는 날은 한양이 다 된다는 말이 자자하였다. 임진년 8월 무장 대접주 손화중이 교도들을 동원해 청죽 수백개와 마른 동아줄 수천발을 구하여 부계를 만들어 석불의 전면에 안진하고 석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