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11월 9일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인 우금티 전투가 개시되었다. 

당시 음력 11월 9일은 양력 12월 5일, 오늘이다. 내 오늘은 꼭 우금티에 가리라 다짐해 두었다.

집에 돌아와 장작 몇 개 뽀개 불 지피고 나니 어느덧 한낮, 늦었지만 출발이다.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 조형물

 

삼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삼례 ic 부근에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이 조성돼 있다. 

농민군이 실제 집결했을 삼례 역참과는 동떨어진 곳,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농민군의 혁명정신이 땅값 싼 외진 곳으로 유배당했다. 

역참터 부근에 있다는 기념비는 찾지 못했다. 

대숲에 둘러싸인 쇠스랑이 잘 다녀오라 손짓한다. 

 

 

삼례에서 공주까지 1시간 남짓, 효포 초등학교를 목표로 달려왔다. 

곧게 뻗은 1번, 23번 국도를 달려오는 동안 은진, 논산, 노성, 이인..

북진하는 농민군과 관련된 귀에 익은 지명들이 휘리릭 지나간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곰티재로 향한다. 

곰티재(능치)는 효포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 곳에서 10월 25일(양력 11월 22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디.  

이름하여 1차 공주전투, 농민군은 우금티에 앞서 곰티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는 진격로를 열고자 했다.  

나는 오늘 곰티재에서 우금티까지 산길을 타려 한다. 

 

 

 

따로 표지판은 없으나 이 곳이 곰티재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고갯마루 돌탑이 쓸쓸하다. 

 

곰티재를 넘으려는 농민군과 이를 막으려는 조일 연합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여졌다. 전봉준은 새벽부터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주력부대를 곰티재에 배치하고, 나머지 부대는 능암산과 월성산에 포진한 조일 연합군을 공격하게 했다.
삼례 기포 이후 상복을 벗고 농민군 복장으로 갈아입은 전봉준은 붉은 덮개가 휘날리는 가마 위에서 열정적으로 전투를 독려했다.
포성이 고막을 찢는 가운데 포연에 덮인 하늘은 먹장구름처럼 거무스름하게 변색되고, 땅에서는 밤새 쌓인 눈이 농민군의 감발한 발목을 휘감았다.
그런데도 농민군은 어디서 그런 힘을 얻었는지 야차나 악귀 한 가지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발아래 짓뭉개진 눈에 차츰 선혈이 번지고, 잎이 져버린 겨울나무는 엄폐물 노릇도 하지 못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불리해졌다. 
오후가 되어 농민군은 칠십여구의 시신을 남기고 시야산으로 후퇴해 화력을 점검했다.

(전봉준 평전 : 봉준이, 온다)

 

 

곰티재 너머 공주시내가 내려다보인다.
보기와 달리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농민군이 치고 올랐을 남쪽 사면은 몹시 가팔라 농민군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을지 짐작하고도 남겠다. 

곰티에서 우금티까지 걷는 동안 물샐틈 없이 공주를 에워싸고 있는 산줄기가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공주 사람들은 공주를 에워싼 산줄기를 '공주대간'이라 거창하게 이름 붙여놓고 즐겨 타는 모양이더라. 

 

 

등산화를 신고 능선을 걷는데도 수북한 낙엽만으로도 발이 자꾸 미끌어진다. 

여기에 눈이라도 살짝 덮힌다 치면..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았을까?

무엇이 우리 할아버지들을 죽음도 불사하는 농민혁명군으로 만들었을까?

 

 
 

 

이런 걸 참호라 하나?

십중팔구 진격해 올라오는 농민군을 겨냥한 방어 진지가 능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다. 

 

 

날이 저문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보이지 않는가?

저 멀리 남녘, 들판 가로질러 달려오는 흰옷 입은 농민군들이..

 

 
 

 

공주 시내에 불빛이 들어오고 산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우금치 산마루에 통곡 소리 묻히고.."

 

사람이 하늘이다

 

우금티에서 달을 본다. 그날도 이런 달이 떴을까?

오늘 음력을 따져보니 동짓달 초아흐레.

125년 전과 오늘 음력과 양력이 일치하다.  

그래 그 날도 이런 달이 떴겠다. 

전투를 마치고 저 달을 본 농민군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전투를 마친 후 전봉준 총대장을 에워싼 농민군 대오는 불과 오백여 명이었다 한다. 

 

이날 농민군은 동쪽 널티재에서 서쪽 봉황산 뒤편에 이르기까지 사십 리를 둘러 깃발을 꽂고 공주를 에워쌌다..
농민군이 사정거리에 들자 조일 연합군은 질서 정연하게 화력을 쏟아부었다.
고막을 찢는 포성에 이어 포탄이 떨어진 자리에서는 흙더미에 섞여 찢어진 살이 솟구쳤다. 그런데도 농민군은 바위와 흙더미를 엄폐물 삼아 악착스럽게 우금티를 싸고 달려들었다..
일본군은 능선에 몸을 감추고 있다가 농민군이 다가오면 일제히 일어나 구령에 맞춰 사격을 가한 후 몸을 감췄다. 농민군은 능선에 잠복해 있는 일본군에게 타격을 입힐 아무런 무기도 지닌 게 없었다..
한때 농민군 이백 여명은 우금티 정상 이백보 앞까지 이르고, 그중 오십여 명은 몇 발자국 앞까지 진출했지만 농민군은 끝내 재를 넘지 못했다..
이규태는 다음 날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다. "아아, 저 몇 만 비류의 무리가... 왼쪽에서 번쩍하다가 오른쪽으로 튀어나오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을 각오로 먼저 산을 오르는데, 저들은 무슨 의리가 있는 것이며 무슨 담력이 있습니까. 저들의 행동을 생각하니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집니다."

(전봉준 평전 : 봉준이, 온다)

 

농민군 입장에서 봤을 때 나는 오늘 우금티를 중심으로 오른짝 산줄기를 탔다. 

우금티에서 충청감영이 있던 자리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어 포기했다. 

무엇보다 산에서 내려오니 몹시 추웠다. 

공주교대 앞에서 택시 잡아타고 효포로 돌아왔다. 

이제 외약짝 산줄기가 남았다. 그곳에서는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다시 날을 잡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