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봉준 장군은 농민군 본대를 해산하고 잠행에 들어간다. 그리고 불과 닷새만에 피노리에서 피체되었다.
마지막 닷새, 그는 무엇을 생각했고 그의 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을까?
관군의 기록에는 김개남을 만나 재기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적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용한다. 하지만 전봉준 자신은 "서울의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전봉준 공초) 말했다. 
어떤 것이 되었건 그의 길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신의 길이 아니었다. 그는 싸움을 끝내지 않았으며 새로운 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으되 뜻을 이루지 못했을 따름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남긴 공초 기록과 유시, 역사에 남긴 마지막 발언들에서 우리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재낀 진정한 영웅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장렬한 패배와 담담한 죽음으로서 그 자신 역사가 되어버린 녹두장군 전봉준은 오늘도 후대의 심장 속에 의연히 살아 있다. 

입암산성에서 백양사로, 백양사에서 피노리로.. 
그들은 시시각각 좁혀오는 포위망 속에서 차려놓은 밥상머리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화급히 담양 방면으로 떠났다 했다. 
백양사에서 피노리까지 1박 2일, 그들은 어떤 길을 잡았으며, 어디에서 하루를 묵었을까?
이것은 나의 오랜 숙제였다. 
이미 일본군과 관군의 첩보망에 노출되고 양반들이 조직한 토벌대(민보군)가 도처에 깔린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들은 거의 대부분 산길을 탔을 것이다. 
이 일대는 남쪽으로 향하는 호남정맥이 종횡무진 치열하게 용트림하는 구간이다. 
오로지 산길만을 따르자면 백양사를 지나는 호남정맥에 올라타면 되겠지만 너무 먼 길을 돌게 된다. 

지난 1월 초 빨치산 전적지를 탐방하던 참에 임방규 선생님께 여쭈었다. 
"선생님, 회문산에서 내장, 입암산을 가자면 어떻게 길을 잡아야 될까요?"
대뜸 답하신다. "우리는 잡방산을 탔어. 가마골을 지나 잡방산을 타면 내장이 지척이여."
앗! 잡방산.. 첨 들어본다. 쌍치, 복흥 어간에 있다 하신다. 
검색 신공을 발휘하니 '잣방산', 이를 한자로 바꿔 잣 백자 '백방산'이라 부르고 있더라. 
눈이 번쩍 트였다. 호남정맥이 남쪽으로 깊숙이 내려갔다 다시 북상하는 오목한 지점에 잣방산이 들어앉아 있었다. 
명백하다. 이 길이다. 산골짝 사이 작은 들판과 냇물을 두어차례 건너야 하지만 빨치산들도 이 산을 타고 넘나들었다 하지 않는가..
산과 산을 잇는 작은 벌과 고개 등을 몇 군데 답사하고 산길샘에 예상 루트를 그려 넣었다. 
대략 35km 정도의 산길이 잡힌다. 거진 백리길..
전봉준 장군이 걸었을 마지막 백리길, 어쩌면 그저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내 그 길을 따라가 보리라 마음 먹은지 이미 오래 되었다.

입암

백양사 입구에서 백학봉을 바라본다. 
당시에 이런 방죽은 없었겠지, 하지만 백학봉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리라. 
장군 일행은 입암산성에서 백양사로 넘어와 청류암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길을 나서 바로 이 근방에서 백학봉을 바라보며 길을 잡았을 것이다. 

 
 

출입이 금지된 용수폭포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호남정맥을 넘어 잣방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아무도 다니지 않아 거칠지만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다. 

 

계곡을 버리고 능선에 올라 아름드리 소나무 빽빽한 솔숲을 헤쳐가다 호남정맥을 만난다. 
산길은 삽시간에 고속도로로 변하고 자연스레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명지산 문수봉(441.8m)이라 적혀 있다.

정맥 길을 따르자니 명지산 정상이 나온다. 
잠시 땀을 식혀 다시 길을 나서는데 가다 보니 가야 할 길과 멀어진 지 오래다. 
반대편으로 가고 있더라. 400여미터를 되돌아갔다. 
정상 못미쳐 능선 삼거리에서 명지 마을 방향으로 갔어야 했다. 
돌이켜보니 애당초 계곡을 끝까지 거슬러 올랐다면 호남정맥을 보다 빠르게 만나게 되고 길을 꽤 줄일 수 있었겠다.
나는 산길을 꽤나 애돌았다. 

 

산에서 내려와 잠시 도로를 걷다 다시 산에 붙는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능선상에는 길이 뚜렷하다. 

 

내장산 배후의 분지 마을 복흥의 좁다란 들판을 지나 추령천을 건넌다. 
이 물을 어찌 건넜을까? 
당시는 한겨울이었으니 얼어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곳곳에 보가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을 터, 물을 건너는 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다시 산에 붙는다. 
몹시 가파른 사면에서 땀 한바탕 쏟고 능선에 올라 생라면으로 끼니를 잇댄다. 
지금까지 물도 없이 오다 복흥 들판을 지나면서 물은 구했으나 이번에는 불이 없다. 
나는 늘 먹을 것을 너무나 소홀히 챙겨 산에만 오면 쫄쫄 굶고 다니기 일쑤다. 
라면 두 개 뽀사먹고 물 마시니 그래도 끼니라고 뱃속이 든든해진다. 
지금부터 잣방산까지는 대략 6km, 눙선길만 곧추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 없다. 
저물겠다. 본래 잣방산 넘어, 산 하나 다시 넘어 치재까지 갈 생각이었으나 택도 없겠다. 
너무 널널하게 걸어온 탓이다. 잣방산 정상에서 자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한다. 

 
 

해가 저문다.
갈 길은 멀었는데 지꾸 지나온 길이 눈에 밟힌다. 
먼 길을 왔다고 돌아보지 말라~
전사가 가는 길 후회가 없다네~

 

어둠이 내리고 달도 뜨고 별도 뜨고..
저 별이 개밥바라기라지..
내나 금성, 새벽에 동짝에 뜨면 샛별, 해 질 녘 서짝에 뜨면 개밥바라기..
배고픈 개가 주인을 기다리는 시간에 저 별이 뜬다네. 아니다. 저 별이 뜨면 개가 배고파지나?
좌우튼 나도 배고프다. 

다 와 간다.
1km만 더 가면 잣방산 정상(668m), 소백산은 작은 잣방산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여기저기서 올빼미 운다. 이 산에는 올빼미가 참 많은갑다. 

 

텐트 치고 차분히 들어앉으니 10시가 넘었다. 
라면 반개 뽀사묵고 책을 좀 볼 요량으로 꺼내놓았으나 이내 잠들고 말았다. 
단 한줄도 읽지 못했다. 

그 날의 장군 일행은 어디에서 고단한 몸을 뉘였을까?
어디 민가에라도 들었다면 분명히 구전으로라도 전승되어 내려올 터인데 오리무중인 것은..
그들은 필시 한뎃잠을 잤을 것이다. 
12월 27일 밤, 한겨울이었는데.. 모닥불은 피웠겠지..
뒤숭숭한 꿈자리 속에 올빼미는 밤을 새워 울었다. 

지나온 길
가야 할 길

기대했던 해는 뜨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그냥 내려가려 했는데 비가 온다네. 
이 시국에 이틀씩이나 산속에 머문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자책이 밀려왔다. 
산 아래서는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우리의 구호는 다름 아닌 "전봉준을 국회로!"가 아니던가? 
어서 내려가 나도 손을 보태야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잣방산을 비롯한 이번 산길의 특징은 길은 있으되 매우 거칠다는 것이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산, 경험이 많지 않다면 수시로 길을 놓쳐 어리둥절하기 십상인 그런 산길이 쭉 이어진다. 
고속도로 같았던 잠깐 동안의 호남정맥은 빼고..

 

이제 산이 급격히 몸을 낮추기 시작한다. 

여기도 추령천..

 

보를 이용해 냇물을 건넌다. 
다행히 물이 짤박 짤박, 신발을 넘지 않는다. 
그 옛날에는 역시 얼어 있었겠지, 보 없는 냇물이 이처럼 깊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은 여기까지, 남은 구간은 다시 틈을 내 이어가는 걸로..
산과 산 사이 자리잡은 자그마한 들판을 지나는데 홍규형의 판화가 생각났다. 
딱 이 자리가 아닐까 싶다. 
그 냥반은 와보지도 않고 어찌 그런 작품을 남겼을까? 
작가의 상상력이라니..
하지만 오늘은 꿩 한마리 날지 않았다. 
다만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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