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놈의 겨울이 이리 따뜻한가, 눈도 안 오고..
용교리 지나 장성 갈재 아래 입암, 배후에 입암산이 버티고 서 있다. 
잠행 길 나선 전봉준 장군이 스며들었던 입암산을 바라보다 그이의 발자취를 거꾸로 밟아 올라간다.  
태인, 원평, 전주 스쳐 삼례, 여산, 논산, 노성 지나 이인.
4차선 국도가 시원스레 잘도 닦였다. 한 시간 반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사이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잘하는 짬뽕집은 쥔양 반이 독감 걸려 문을 안 열었다.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 속을 채우고 칼칼한 목도 축인다. 

취병산 오름길에서 바라본 이인면 소재지 전경

이인은 농민군 2차 봉기 후 농민군 주력부대와 관군 간에 첫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11월 19일(음력 10월 22일)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농민군이 이인을 점령했다. 
농민군은 급파된 관군을 맞아 취병산에 진을 치고 이인역을 거점으로 한 관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사진 맨 왼쪽 이인역 터에는 이인초등학교가 들어앉아 있다. 
별도의 농민군이 곰나루 방면으로 우회하여 봉황산을 넘는다는 급보에 놀란 관군이 우금티로 후퇴하고 농민군도 경천으로 물러나 전봉준 부대와 합류한다. 

취병산은 이인 중학교 뒤편에 자리한 나지막한 산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불리지 않을뿐더러 별도로 붙여 부르는 이름조차 없는 모양이다. 
아무도 모르더라. 
취병산을 오르다가 잡목에 막혀 중도 작파하고 내려왔다. 

곰티 넘어 공주를 도모하기 위한 효포 방면에서의 1차 전투 이후 논산으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농민군 2차 진격(12월 4일) 당시 이인 주둔 성하영 휘하 관군은 후퇴 명령을 내릴 겨를도 없이 농민군에게 포위되었다가 야음을 틈타 간신히 우금티로 도망칠 수 있었다. 

손병희 부대가 널티를 소란스럽게 하는 사이 그쪽에 신경을 쓰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성하영 앞에 전봉준 부대가 땅에서 솟은 것처럼 떠올랐다. 정면에서 돌연히 나타나 진격해 오는 농민군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성하영과 휘하 관군이 몸을 돌리자마자 오실산 윗길에서도 한 무리가 나타나 이들의 퇴로를 막아섰다. 먹잇감을 만난 농민군은 주변 봉우리에 횃불을 밝히고 총포를 쏘며 으깰 듯 성하영 부대를 압박했다. 성하영 부대의 입장에서는 전멸을 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행인지 불행인지 어둠이 내리면서 비가 질금거려 농민군의 화승총이 잠시 무디어지자 그들은 결사적으로 북쪽의 포위망을 찢고 부상병을 들것에 실어 우금티로 돌아갔다.(전봉준 평전 : 봉준이, 온다) 

세월이 흘러 한국전쟁 당시에는 후퇴하던 미군이 조선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숱한 전사자를 냈다 한다. 
그래 '통한의 지역'이라고 면사무소 앞 돌에 새겨 놓았더라.

11월 13일(음력 10월 16일) 논산에서 만난 남북접 농민군이 '척양척왜' 기치 높이 공주를 향해 출발한다. 
전봉준 장군은 충정 감사 박제순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냈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감히 외칙내유(外飭內誘)로써 목숨을 유지하려 하는가. 왜의 침략자들이 구실을 만들어 군대를 동원해 임금을 핍박하고 백성을 근심케 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일편단심 죽음을 각오하고 나라의 백성으로서 두 마음 품은 자들을 소탕하여 조선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니 크게 반성하여 의로써 함께 죽는다면 천만다행이겠노라."

전봉준 장군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충청감사 박제순은 농민군 진압에 사력을 다했으며, 10년 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역적 을사오적의 1인으로 역사에 자취를 남겼다. 
면사무소 앞에 그의 비가 서 있더라. 

이인에서 우금티는 지척이다. 우금티 전적지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동학농민군 위령탑, 동판 글씨를 박정희가 쓴 모양이다. 
탑 앞뒷면 박정희 이름자, 5.16 혁명이니 10월 유신이니 하는 따위의 글귀는 민중들이 갈고 닦아서 지워지고 없더라..  

 
 

우금치 고갯마루에서 견준봉 방향으로 산길을 잡는다. 
겨울 날씨 이래도 되는 건지.. 오늘 같은 날 우금티 순례길에 나서는 것이 민망할 정도로 푸근하다. 
우금티에서 견준봉에 이르는 구간, 곰티재에서 우금티에 이르는 산길 내내 보이던 참호들이 보다 뚜렷하고 견고한 형태로 밀집되어 있다.
우금티와 견준봉 사이, 이 곳이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모리오 휘하 일본군의 화력이 집중된 곳도 이 곳이다. 
이들은 최소 2중 혹은 3중의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몸을 은신하고 있다 농민군이 사정거리에 들면 몸을 세워 일제히 사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전투 정황을 장위영 참모관인 구완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우금치와 견준봉 사이에 이르러 산허리(능선)에서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적병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자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하였는데 4, 50차례를 이와 같이 하였다.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 관군이 일본 병사 사이에 나열하여 탄환을 발사하는데 오차가 없었다. 일본 병사 역시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공산초비기)

통탄할 노릇이다.
침략자 군대와 나란히 서서 동포의 가슴팍을 향해 총알을 발사하는 관군이라니..
이렇게 놓고 보면 세상 참 변한 게 없다. 

저 아래 능선, 산봉우리마다 농민군 깃발이 펄럭이고 흰 옷 입은 농민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겠다. 
당시 농민군은 동쪽 널티재(판치) 뒷 봉우리에서 서 쪽 봉황산 뒤편까지 40여 리에 걸쳐 산 위에 진을 치고 공주를 포위했다.
농민군은 우금티 외에도 곰티재, 새재, 하고개 등을 공략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두리봉 부근에서 본 우금티 방면 산줄기

공주 시내에서 우금티로 넘어가는 도로가 보인다. 
맨 뒤편 산줄기는 계룡산. 

두리봉에서 내려다본 새재 방면. 
일단의 농민군은 새재를 넘거나 곰나루 쪽으로 우회하여 봉황산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이들은 봉황산을 넘거나 봉황산과 일락산 사이 하고개를 넘어 봉황산 자락에 자리한 충청 감영을 들이칠 계획이었다. 

눈 아래 왼편 봉황산, 중앙부 하고개가 가늠된다. 
하고개를 넘어 산모퉁이만 돌아가면 바로 감영이다. 

농민군이 뚫고 가고자 했던 혈로가 눈에 잡힌다. 
하지만 농민군은 하고개로 향하는 골짝을 돌파하지 못하고 싸늘한 시체가 되어 송장배미와 그 일대에 자곡차곡 쌓여 시산혈해를 이뤘다. 이들 중에는 장꾼으로 위장한 별동대도 있었다.  

산줄기가 끝나고 나는 산에서 내려왔다. 
송장배미 전적지를 찾는다. 
아무런 표지판도 어떠한 이정표도 없어서 지척에 두고도 한참을 오락가락했다. 
논은 사라지고 용못이라는 자그마한 물웅덩이만 남았다. 
사철 마르지 않는다네, 골짜기에서 흘러드는 물이 있으니..
농민군의 피가 흐르던..

남녀 농민군을 상징했다는데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예술적 안목이 부족한 탓이려니 해야 되나?
당시 무리 죽임을 당한 농민군의 고통이 아닌 뭔가 다른 종류의 알 수 없는 고통이 느껴질 듯 말 듯..
술 한잔 올릴 엄두도 못 내고 발길을 옮긴다. 

봉황산 자락, 우금티에서 이어지는 주릉과의 사이에 길게 골짝이 형성되어 있고 그 끝자락에 구불구불한 논배미들이 남아 있다. 
이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면 하고개, 농민군들이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그러나 끝내 다다르지 못했던..

고갯길을 마다하고 굳이 봉황산을 넘는다. 
당시 봉황산에는 유생 중심의 민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한다. 
나라 망하는 것이야 어찌 됐건 봉건적 신분제 유지가 더 절실했던 덜 떨어진 사람들..
두리봉 너머 해 넘어간다. 

감영터에서 우금티 방면을 바라본다. 
불과 오리길.. 아~ 통한의 우금티여!

우금티를 중심으로 양짝 산줄기를 밟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우금티를 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무수한 농민군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떻게 싸웠나. 
분명한 것은 그이들이 아무런 작전도, 전략도 없이 부나방처럼 몸을 내던진 무지렁이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길지 않은 산줄기를 답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고도 남겠더라. 
왜 굳이 공주였는가 묻지 마시라.
충청의 공주는 호남의 전주와 다르지 않다. 
공주는 백제 이래 충청권의 심장이었다. 
농민군들과 그 지휘자들에게는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지략이 있었고 무엇보다 하늘을 찌르는 의기가 있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해외 침략에 맞선 최초의 민중항쟁은 절대적인 화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됐다. 
그러나 그이들은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했지만 조선의 새 하늘을 열었다. 
조선의 근대는 그이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자양분은 오늘도 마르지 않고 샘솟고 있음이라. 
갑오에서 오월로, 오월에서 통일로!!

2019/12/06  곰티재에서 우금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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