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뀐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네, 내일이면..
정말로 해가 바뀔까? 가서 봐야지, 그래야 알지.

해맞이 짐을 꾸린다. 이리 할까 저리 할까, 이 궁리 저 궁리.
생각이란 놈이 온종일 오락가락 열두 번도 더 바뀐다.
나이가 든 게지, 길을 나서기가 쉽지 않다. 
해 질 녘이 돼서야 짐이 꾸려졌다. 
빠진 것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선다. 

양고살재
 
 
 

차 안에서 또 한참을 뭉기적대다 이미 어둠이 내리고서야 산을 오른다. 
장갑 한 짝이 온 데 간 데 없다.  목장갑 두 개 겹으로 끼고 간다. 
모처럼 눈이 쓸만하게 내렸다. 
능선엔 칼바람, 눈보라 거침없이 혹은 고요히, 오락가락..

산이 온통 하얗다. 불 없이도 능히 오를 만하다. 
사진 찍을 때 말고는 불이 필요 없다. 
불 없이 오르는 하얀 산의 정취를 표현할 길이 없다. 
직접 경험해 보시란 말 밖에는..

벽오봉

휘황한 고창읍내 내려다 보고..
 

다시 길을 간다. 쩌기 저 봉우리 살짝 구름 속..

다 왔다. 

 

몸이 식기 전에 신속하게 집을 짓고 라면을 끓인다. 
세상에 없는 라면, 뉘라서 이 맛을 알까..

텐트 안이 훈훈, 젖은 것들을 말린다. 
환기 주의..

얼마나 잤을까? 오줌이 마려워.. 아 정말 싫다. 
새벽 네 시, 하늘엔 달이 동동, 구름이 흘러간다. 
흐르는 게 어디 구름뿐이랴.
달도 흐르고 구름도 흐르고, 구름에 달 가듯..

해를 볼 수 있을까? 그냥 잠이나 더 잘까? 
눈이 펄펄 내리다 그치다 새해 첫날부터 갈피가 없다. 

 

주섬주섬 챙겨 입고 정상으로..
온통 눈 천지, 바람 없이 고요하다. 

저 앞에 봉수대, 입암, 내장 방향.
저 구름 속 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라 이 짝이었군.. 장성 방향, 해가 남쪽에 있다. 
새해 새 해라 방향을 잃었나?
여름과 겨울, 해 돋는 자리가 이렇게나 차이가 나다니..
방장산 해맞이가 한두 번이 아닐진대 꽤 당황스럽다. 

봉수대 옆 저기 멀리 아침 햇살에 빛나는 두승산이 신령스럽다. 
언제쯤이면 사진기가 사람 눈을 따라올 수 있을까? 그 느낌 그대로..

 
 
 
 

사람들이 올라오고 구름도 따라 올라온다. 
이제 내려가야지, 흔적 없이 짐을 싼다. 

다시 정상, 산의 모습이 시시각각 달라진다.
구름이 모이는가 하면 흩어지고 햇살이 비치는가 하면 눈발이 날린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 능선으로 길을 잡는다. 
무인지경, 전인미답의 숫눈길을 헤쳐 간다. 
눈에 묻혀 사라진 길을 열고..

능선 초입 산죽밭에서 한참을 허우적대다 겨우 빠져나왔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가 본 사람만이 이 맛을 안다. 

 

길을 잃지 않고 능선을 고수하며 방향을 잡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30여 년 전 방장산 주릉 길이 이랬다. 
이따금 무릎을 넘는 눈길, 허리를 넘어야 제 맛인데, 그래야 방장산인데..
요사이 눈발이 너무 약해져 아쉽다.  

차디 찬 눈이 온 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그래 이 기운으로 한 해를 살자. 

 

급경사 비탈길, 따뜻해진 눈이 발길을 재촉한다. 

안착, 다 내려왔다.
저 앞에 마중 나온 영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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