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석 달?  호남정맥에 다시 안긴다. 
한 번 멀어진 발길 다시 잇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하여 쇠뿔은 단 김에 빼라 했던 모양이다. 

슬치는 임실 관촌에 속하며, 호남정맥이 한없이 몸을 낮춘 구간이다.
마을을 통과하는 탓에 사람들의 간섭이 심하여 능선길이 위태롭게 이어진다.
사람의 손을 탄 곳일수록 가시덩굴에 잡목이 우거져 길을 잘못 들거나 통과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겨울이라 다행이긴 하나 마을과 그 뒷산을 통과하는 문제가 마음에 걸려 있던 차에 슬치에서 실치재(혹은 뒷재)에 이르는 약 2km쯤 되는 구간을 잠시 짬을 내 미리 걸었다. 
낮은 지역이라선지 산들이 모두 납작 엎드려 드넓은 구릉지대로 보인다. 
멀리 모악산은 분명한 데 왼쪽 산을 알아볼 수 없다.
위치로 보아서는 경각산일 터인데 산 모양이 달리 보인다. 

짧은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지는 노을을 보며 다짐한다. 
내 꼭 내일 다시 오리라. 


 

2월 9일 오전 9시 50분
어제 말한 내일, 밤새 강치 했는지 날이 꽤 차다.
하늘 몹시 푸르고 날 참 좋다.

오늘 산길은 임실 신덕을 왼편에 두고, 완주 상관 지나 완주 구이를 오른편에 끼고 이어진다.

멧돼지들의 소행이라지..
등을 빡빡 문지를 때 얼마나 시원했을까?
하지만 나무에는 깊은 생채기가 남았다.  

 

고도가 얼마간 오른 벌목지, 조망이 터진다. 
저기 멀리 지리 주릉, 천왕은 외약짝 한쪽에 치우치고 반야가 우뚝 솟았다.
망원으로 당겨 반야를 알현한다. 

 

갑자기 나타난 개활지, 뭔가 했더니 폭발물 처리장이라네. 완주 상관면에 속해 있다.
불발탄이랄지, 폐기하는 폭탄이랄지 이런 걸 터뜨리는 모양이다. 
정맥은 폭발물 처리장을 감싸고 크게 반원을 그리며 돈다. 
정점에 갈미봉이 있다. 

철책 너머 옥녀봉, 한오봉.. 왼편에 모악산.

정오, 갈미봉에서..

철책에 가린 산하가 애처롭다. 

쇠붙이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시인이 그리던 그런 날은 언제나 올까?

이 안에 그간 걸어온 금남호남정맥과 호남정맥의 모든 산들이 다 들어 있다. 
멀리 마이산과 그 뒤에 버티고 있는 덕유 주릉이 가늠된다. 

마이산이 덕유산을 향해 공손히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 기세 충천하는 마이산이 이리 보이기도 한다. 
보기 나름이겠지만..

12시 20분, 산중 식사

점심을 먹으며 잠시 세상 일을 본다.
한 시간을 앉아 있었더니 몸이 얼어 다시 출발하려니 몸이 삐그덕 댄다. 

능선 위의 똥 돌, 족제비? 담비?
주로 감을 자셨나 보다. 
헌데 은행도 자셨나, 그대로 나왔네. 
이 녀석 입장에서는 감이나 은행이나 다 같은 과일인 모양이다. 

13시 45분, 쑥치

움푹 꺼진 쑥치를 지나고 나면 한바탕 된비알이 나타난다. 
여기를 치고 올라야 옥녀봉, 한오봉, 경각산과 고덕산이 갈리는 갈림길..
할랑할랑 걷는 편안한 산길이 끝나고 비로소 산 타는 맛이 난다. 

된비알에 서서 뒤를 돌아본다.
눈 앞에 만덕산이 버티고 있다. 

14시 55분 옥녀봉

옥녀봉은 정맥 길에서 살짝 비켜 있다. 
갈까 말까를 망설이다 그 이름에 끌려 다녀왔다. 
역시 조망이 없다. 구태여 꼭 들러 가지 않아도 되겠다. 

15시 15분, 한오봉

한오봉에서 고덕산과 경각산으로 가는 산길이 갈린다. 
조망은 진안 방면으로만 살짝 터진다. 

마이산과 덕유 주릉

한오봉에서 쉬는 참에 경각산에서 문자가 날아온다. 
어서 오라네.. 
대략 3km, 쉬 가 닿겠다 생각하고 가볍게 출발했으나 오산이었다. 
연속되는 급경사 오름길에 시원한 조망, 시간 잡아먹기 딱 좋다.
그리고 산길에는 에누리가 없다는 사실.. 
명색이 겨울인데 땀을 쏟는다.

모악산
전주 방면
모악산과 전주시
경각산

15시 55분, 바위 지대가 나타나고 조망이 터진다. 
모악산의 전모가 드러나고 전주, 경각산 방면이 활짝 열린다. 
예서 보니 전주는 모악산이 늘어뜨린 기다란 산자락에 줄을 대고 있다. 마치 탯줄인 양..

산 참 많다. 
헌데 알만한 산이 하나도 없네..

마지막 오름길이다 생각하고 돌아본다. 
한오봉과 옥녀봉 사이에서 생겨난 긴 계곡이 흐르고 임도 한 줄기 산을 기어오른다. 

 
16시 40분

마지막으로 알고 오른 비탈길, 고래 뿔은 저만치 물러나 있고 돌탑 하나 덩그러니 서 있더라. 
그 돌탑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더라. 
호남정맥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반야봉이 갑이다. 
반야를 바라보는 돌탑이라..
돌탑을 쌓아 올린 그 마음 알 것도 같다. 

저 건너 고래 뿔 위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사람새 하나 발견했으나 때마침 배터리가 방전되고 말았으니..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담지 못했다.

17시, 경각산

경각산 정상, 정상석도 조망도 없다. 
빠르게 통과한다. 

뉘엿뉘엿 해 넘어가는 산길을 타박타박 내려간다. 
오늘의 종점 불재가 내려다보이는 지점, 기가 막힌 조망처, 그곳에서 우보 형이 기다리고 있다. 
고마운 양반, 오래 기다렸다네. 
사과 한 개, 남은 김밥 나눠 먹고 해 넘어가기를 기다린다. 

우보 혹은 느린소

17시 50분, 발아래 구이 저수지, 저 건너 모악산 너머로 해 넘어간다.
홀로 걷는 산길에 익숙해져 있지만 넘어가는 해, 함께 보는 사람이 있으니 한결 좋다.

 
 
18시

호남정맥 슬치~불재 구간을 마감한다.
발 빠른 사람들 불재 지나 영암재까지 한 구간으로 엮어 지나가더라만 나는 이 정도가 딱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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