낫네 낫어 난리가 낫어 2014, 56X108cm, 목판화

역사학자 고 이이화 선생은 조선 후기 마지막 100년을 '민란의 시대'라 명명했다. 1811년 홍경래의 관서농민전쟁으로 서막을 열고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거쳐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타올랐으니 민중사적 견지에서 들여다 본 조선의 19세기는 온통 민중들의 변혁 열망으로 들끓었던 셈이다.
1800년 정조 사후 그가 추진하던 걔혁이 중단되고 극심한 세도 정치가 발호했다. 몇몇 세도가와 문벌이 조선의 모든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완고하게 뿌리를 내리며 나라를 좀먹고 거덜냈다. 백성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세도정치는 매관매직을 낳고 매관매직은 탐관오리를 낳았다. 이들의 참혹한 수탈과 착취로 조세제도의 근간인 삼정(전정, 군정, 환곡)이 문란해져 농민들은 1년 내 농사지어야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빚더미에 올라앉았으며, 논밭은 물론 처자식까지 빼앗기고 유랑걸식하는 유민이 되기 일쑤였다. 

1894년 갑오년 정월 초열흘(양력 2월 15일), 고부 농민봉기가 발발했다. 이 날은 익산군수로 전임되었던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눌러앉은 날이다. 불꽃이 튀었다, 한 점 혁명의 불꽃! 전봉준이 이끄는 1천여 고부 농민들이 항쟁에 돌입했다.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징치하고 무기고를 부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수탈의 상징 만석보를 허물었다. 성장을 거듭해온 민중들의 변혁역량이 고부봉기로 일대 변곡점을 맞게 되었으니 고부봉기는 어떤 이유로 여타의 다른 농민봉기와 달리 민란의 시대 백 년을 집약하는 혁명의 발화점으로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기게 되었을까?

'낫네 낫서 난리가 낫서
에이 참 잘 되얏지
그양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나 어데 나머 잇겟나' 

드넓은 배들평야와 세곡선이 드나들던 줄포를 고부는 호남의 절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라던 한양의 권문세가에게 고부는 기회의 땅이었으되 백성들에게는 수탈과 재앙의 땅이었다. 당시 조병갑의 폭정과 탐학에 신음하던 고부 민중들은 난리가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일평생 혁명가로서의 역량을 다지며 전국적인 기포를 꾀하고 있던 전봉준과 동지들이 가담했던 것이다. 고부에서의 농민봉기, 탐관오리 조병갑과 혁명가 전봉준, 이들의 만남과 대결은 역사의 필연이었다

전봉준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2 삼례집회에서다.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금지, 교조 신원, 탐관오리 처벌을 요구하며 수천 명이 모였던 삼례집회의 항의문서를 관아에 전달한 이가 전봉준이었다당시 동학교도들이 벌인 교조신원 운동은 1893 한양에서의 복합상소 운동과 보은, 원평집회를 거치며보국안민’ ‘척왜양운동으로 확산 발전되었다. 과정에서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혁신세력이 교단 내의 지도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녹두장군의 명성이 때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봉건 착취가 극에 달하고 외세의 침탈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갑오년을 맞는 혁명가 전봉준에게 전국적인 기포를 서두르는 일은 이상 미룰 없는 과제가 되었다. 전봉준의 계획 속에 처음부터 고부 봉기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수는 없다. 그러나 처처에 모여 난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며 세상을 꿈꾸던 민중들과 일생을 벼려온 혁명가의 열정이 비켜갈 수는 없었으니 고부 농민봉기는 갑오년 새해 벽두 찬연한 혁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