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고부 두승산을 배경으로 너른 들판 한가운데 나지막하나 거연히 솟은 백산을 대지에 몸을 반쯤 담근 농민으로 형상했다. 치켜든 팔뚝 주위에 파랑새가 날고 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대회를 열고 ‘백산 격문’을 만방에 날렸다. 재백산(在白山), 2018, 30×60cm, 목판화

고부를 빠져나간 전봉준은 불과 일주일 만에 다시 고부로 출병했다. 고부 봉기의 해산과 농민군의 출현은 사실상 동시에 진행됐다. 치밀한 사전 준비와 조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월 20일(음력)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고부를 접수하고 백산에 집결하여 격문과 4대 명의를 만방에 띄워 혁명의 성격과 임무, 대상과 주체를 분명히 하고 기율을 엄정히 했다. 그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동학농민혁명군, 그 수가 1만명에 달했다. 당시 농민군의 서슬 퍼런 기상이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로 오늘에 전승되고 있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

각처에서 농민군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조직된 동학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 삼례집회, 원평취회 등을 통해 훈련되고 조직됐으며 새로운 세상을 향한 결기 가득한 동학의 포접 조직으로 망라됐다. 그들은 스스로를 남접이라 칭했다.
놀랍게도 이 시기(음력 3월 24일) “제주도 농민군이 사포에 상륙했다”는 일본인의 기록(전라도 고부민요일기)이 전한다. 흥덕현에 속한 사포는 줄포와 인접한 포구로 무장에서 출발한 농민군 진격로 상에 있다. 농민군들이 이미 고부를 접수하고 백산으로 집결하던 시기였으니 이들은 곧바로 백산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전라도 고부민요일기’는 재부산 일본 총영사를 통해 외무성에 보고됐다. 훈련된 첩자의 보고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민족자주운동의 도도한 흐름

사포에 상륙했다는 제주도 농민군의 활동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우금티 패전 이후 남해안까지 몰린 일단의 농민군이 진도를 거쳐 제주도로 넘어간 사실, 관의 늑탈을 피해 제주도로 집단 이거한 동학의 일부 세력(남학당)이 방성칠, 이재수로 이어지는 제주 민중항쟁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실 등이 확인된다. 흔히 이재수의 난으로 널리 알려진 신축항쟁은 반세기 만에 4.3항쟁으로 계승됐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면면히 이어지는 반제 민족자주운동의 도도한 흐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함이라”는 격문이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 식인종과 주구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라는 호소문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4월, 숭고한 혁명과 항쟁의 시절

4월이다. 4월은 봄! 꽃피는 춘삼월 호시절, 허나 우리에게 4월은 숭고한 혁명과 항쟁의 시절이다.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고 분단극복의 과제가 더해졌다. 미처 청산되지 못한 봉건의 굴레 위에 자본주의의 폐해가 덧씌워졌다. 근본에서 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도 싸운다.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완전한 평화와 통일을 위하여, 만민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하여 싸우고 또 싸우고 있다. 그 기나긴 싸움에서 농민들은 여전히 앞자리에 서 있다. 누천년 나라를 먹여 살려온, 뼈와 살이 되어준 농민들이지만 가장 커다란 무시와 멸시, 희생과 고통이 우리의 머리 위에 들씌워져 있다. 하여 우리는 여전히 혁명의 주력군이다. 4월을 4월답게 살자.

※ 농민군 4대 명의

①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을 파괴하지 않는다.
②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③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어 없애고 왕의 정치를 깨끗이 한다.
④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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