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새벽길을 가다], 2012, 55X88cm, 종이에 채색, 한국화

새벽길 헤쳐가는 사람들 있어 역사는 전진한다.
여기 새벽길 홀로 걷는 이 있으니 그 이름 전봉준, 녹두장군 되시겠다. 
얼마나 많은 필사의 노력 겹겹이 쌓여 그는 혁명의 지도자로 그 이름 역사에 남기게 되었을까? 
역사는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난리가 나기만을 기다리던 고부 농민들과 일평생 혁명을 준비해 온 전봉준의 만남이 고부 농민봉기를 여느 고을의 민란, 농민봉기와 다르게 했다. 
죽창을 들건 장두가 되건 피차 목숨을 거는 일,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 없을 터 일개 고을의 난리와 고을을 벗어난 반란은 차원이 달랐다. 
생존을 위해 죽창 들고 나선 사람들과 혁명을 위해 봉기의 확산을 꾀한 장두 사이에 곡절인들 어찌 없었겠는가? 
그렇게 나선 길, 고부 농민봉기는 두 달간 지속되었다. 

민란을 넘어 혁명으로

조병갑이 전주로 달아나고 농민들은 만석보를 허물어 버렸다. 
목적한 바를 일부 전취한 농민봉기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당초의 약조대로라면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행해야 했다.
전봉준은 말목장터에서 백산으로 진을 옮기고 전라도 각지에 봉기를 촉구하는 '창의 격문'(2월 20일, 양력 3월 26일)을 날리는 등 봉기의 확산을 꾀하였다.  
그는 훗날 왜 민란을 일으켰냐는 질문에 “세상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갔으므로 개연히 한 번 세상을 건지려는 목적이었다”라고 답했다. 
일개 군현 단위 농민봉기로 끝내고자 함은 그의 본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봉기에 가담한 군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봉기의 확산을 원치 않았다. 
전봉준의 호소에 화답한 것은 고을 밖의 동지들이었다. 
창의 격문이 날아간 열흘 정도 뒤 인근 고을에서 농민들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구, 원평, 태인, 부안 등지에 동학당이 모여들고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는바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격문을 접수한 동학의 포접 조직이 발동된 것이다. 
그들은 무장현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부 농민봉기는 끝내 고을 지경을 벗어나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역사적 소임을 다하였으니 봉기 기간 내내 타오른 백산의 봉화는 인근 고을을 격동시키고 전봉준과 그 동지들로 하여금 새로운 거사를 준비하기에 충분한 힘과 시간을 제공했던 것이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

새벽을 열고 길을 헤쳐가는 사람들, 역사 이래 그들은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오랜 기간 그들은 농민이었으며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혁명가 전봉준이 여는 새벽길 또한 그 길과 일치해 있으니 그 길이 역사다. 
그림 속 전봉준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이른 새벽 숫눈길을 헤쳐가고 있다.
아마도 동지를 만나고 돌아가거나 또 다른 동지를 만나러 가는 길일 터,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을 생각한다.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김도삼, 손여옥, 송두호...
이들은 성장기 혹은 청년기를 지나며 이미 동지가 되었거나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고부 사발통문에 이름을 함께 올리고 혁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생사를 함께 했다.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전봉준이 걸어온 길은 일생을 걸고 동지를 규합하고 그들과 더불어 혁명을 도모하고 실천한 길이었다.
혁명가 전봉준이 역사에 길이 남는 것은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음이다.
그는 여기에 더해 한 걸음 앞을 내다보는 전략적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고부 농민봉기의 와중에 그는 실패를 예견하고 새로운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런 그로 하여 고부 농민봉기 또한 역사에 남다르게 기록되는 것이다.

  • 전봉준은 "아직 때가 이르다"는 손화중을 설득하기 위해 그가 머물던 처소(무장현 양실)를 자주 찾았다. 손화중의 부인 류 씨는 "눈발이 내리는 어느 겨울날 해 질 무렵 전봉준이 찾아와 뒷 골방에서 그날 밤 닭이 울도록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라고 술회하였다. 어쩌면 그림 속의 전봉준은 손화중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겠다. 그의 얼굴에 간밤 격론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음을 비로소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