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앞에 서다, 2014, 40X105, 목판화

청일전쟁 발발 후 조선 민중의 반일 항쟁은 마른풀에 불이 붓 듯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공주와 이인, 보은에서 무장한 농민군이 출현하고 공주 부근에 집결한 농민군 만여 명이 충청 감영군과 대치하였다. 천안에서는 농민들이 일본인을 처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영남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북상하는 일본군 병참부에 대한 습격과 서울 부산을 연결하는 통신선을 절단하는 일이 거의 매일같이 전개되고 있었다. 상주, 안동, 김천, 예천 등지에서 농민군들의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밖에 영동 지역에서도 농민군들이 출현했고, 호서와 가까운 근기 지역(죽산, 안성 등)에서도 한성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멀리 해서 지역과 청일 간 전투가 벌어진 평양 인근에서도 항일 투쟁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갔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행위에 맞선 조선 민중의 투쟁이 번져감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지배세력은 농민군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의 투쟁을 신분질서를 뒤흔드는 '강상의 문란', 지배체제의 위기로 받아들여 외적의 침략행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농민군 토멸에만 관심을 몰두하고 있었다. 개화파 정부(군국기무처)는 평양 전투를 전후하여 농민군에 대한 무력진압 방침을 공식화했다. 조선군이 무장 해제된 상태에서 정부의 무력진압 방침은 결국 일본군에 의존하는 것으로 되었다. 민씨 정권이 청군의 힘을 빌려 농민군을 진압하려 했다면 개화 정부는 일본군의 힘을 빌려 농민군을 진압하고자 한 것이다. 

9월 16일(음력 8월 17일) 일본군이 평양 전투에서 승리했다. 평양을 공략하여 함락시킨 일본군은 연달아 황해해전에서 청국의 북양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청일전쟁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 일련의 전투 승리로 일본은 대륙 진출의 진로를 열고, 청국 군이 사라진 조선에서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조선에서 일본군의 침략행위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은 농민군뿐이었다. 오직 농민들만이 국권침탈의 위기에 맞서 싸울 유일한 민족자주 역량이었다.

당시 전봉준은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에 시간을 집중 할애하였고 평양 전투 이전까지 관망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봉준은 ‘관민상화지책’을 견지하고 주변 세력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시간을 벌고 있었다. 반면 민과 관의 ‘상화’가 불가능하다고 본 김개남은 은거하던 임실 상이암에서 나와 남원 대회를 열어 본격적인 기포 준비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전라좌도에서 수만의 농민군이 남원에 집결했다. 전봉준이 남원으로 달려가 김개남과 깊은 논의를 주고받았다. 너무도 엄혹한 시기였다. 이제 결론을 낼 시기가 되었음을 두 사람은 직감하고 있었다. 이후 전봉준은 나주 수성군의 해산을 권고한 뒤 장성에서 손화중을 만나 깊은 의견을 나누었다. 그렇게 9월(음력 8월)이 가고 있었다. 

농민군 2 봉기의 서막은 이미 올랐다. 2 봉기는 제국주의 침략자 일본과의 전면전으로 것이 자명했다. 일본군과의 일전을 앞둔 전봉준의 심정을 어떠했을까? 가장 강력한 군대라 여겼던 청군마저 가볍게 물리친 고도로 근대화된 일본군이었다. 전주성 전투에서 근대화된 무기의 위력을 익히 경험한 그였다. 하지만 피할 없는 길이라면 가야 했다. 몇만 농민의 생령과 조선의 운명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